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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마을이 전하는 위로 ‘이 또한 지나가리라!’

  • 입력 2021.11.04 00:00
  • 수정 2021.11.26 10:30
  • 기자명 김광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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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미스대구 선 김혜린(오른쪽)씨와 미스대구 의성마늘소 미 이인영(왼쪽)씨가 화산마을의 포토존에서 포즈를 취했다.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산지개간정책에 따라 180여가구가 집단 이주해 마을을 형성한 곳으로 몇 해 전부터 빼어난 전망과 풍광으로 군위를 대표하는 힐링 관광지로 자리매김했다


사람들은 떠난다. 떠나는 방식도 이유도 다양하다. 간단하게 말하면, 누군가는 먹고살 만해
서, 또 누군가는 먹고살려고 떠난다. 이중에서 먹고살기 위한 이동은 전쟁을 방불케 한다. 역사
를 들춰보면 실제로 전쟁터로 떠나기도 했다. (19세기 영국군에 지원한 사람의 80%는 실업자
들이었다.) 이민자들은 이주한 국가의 형성과 흥망성쇠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 허다했을 정도
로 그 규모가 엄청났다.
청년들의 해외 취업이 전 유럽에서 권장되던 때도 있었다. 14세기 무렵이었다. 명분은 ‘기술
연마’와 ‘인격 수양’이었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취업이 힘들었다. ‘길드’(중세 유럽의 동업
자조합)에서 만든 룰이었다.
복장도 규정되어 있었다. 자기 기술 분야를 드러내는 모자를 쓰고 해외 연수의 증표인 지팡
이와 단검을 지녔다. 기술과 인격을 고양하러 온 청년들을 가장 반긴 것은 길드 소속 장인들이
었다. 마음껏 부려 먹었다. 마음에 안 들면?
“인성이 안 됐어. 다른 도시로 가봐!”
가장 불행한 견습 청년은 다른 도시로 이동하다가 강도를 만나서 죽는 경우였다. 그래도 어
쩌겠는가. 먹고살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던 것을.

“스스로 기적을 만들어라”
60~70년대 경북 의성에서 황무지 개간 사업에 나선 사람이 있었다. 박화숙(1919~1976). 그
의 아들인 박병욱 ‘달인의 찜닭’ 대표에 따르면 당신은 해방 직후부터 황무지를 개간하기 시작
했다. 의성군 안계면 용기5동 일명 팔자갈마을을 시작으로 단북면 등 27년 동안 수십만 평을
옥토로 개간했다.
사업을 시작할 즈음은 전쟁 직후였고 상이군인들이 많았다. 사업을 시작하면서 모집 공고를
내서 찾아온 이들 중 상이군인 스무 명을 선발했다. 개간을 시작하고 얼마쯤 지나자 전국에서사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살길이 막막했던 이들이 “거기 가면 먹고 살 길이 생긴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의성으로 왔다. 이들에게는 엄격한 시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체력 테스트 등을 통해 직원을 선발했다. 선발 후에도 일정 기간 합숙교육을 진행했다. 당시에는 전쟁으로 팔이나 다리를 잃은 사람이 많았는데, 박씨는 그런 이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려고 노력했다. 이를테면, 왼팔이 없는 사람을 오른팔이 없는 사람과 한 팀으로 만든 뒤 각자 한 팔씩을 써서 돌을 들어 옮기는 게임을 진행했다. 서로 돕는 협동정신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직원의 중매를 설 때도 있었다. 60년 즈음부터 일하기 시작한 K씨도 그런 인물이었다. 워낙 성실했기 때문에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도 두루 인정을 받았다. 박씨는 K씨를 동네 아가씨와 연결시켜 줬다. 아가씨 부모님의 결혼 승낙은 “성실성 하나는 보증한다”는 그의 한마디로 충분했다.일하기 시작한 지 12년째 되던 해였다. 달 밝은 어느 밤에 K씨가 마당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한참을 흐느낀 후에 이렇게 고백했다. “회장님, 사실은 제가 12년 전에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여기로 왔습니다. 참회하는 마음으로 악착같이 일했습니다.”이 말을 들은 박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인 K씨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 시절 먹고살 길을 찾아 의성으로 흘러들었던 ‘일꾼’들 중에 아직 의성에 살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그 시절 많은 이들이 도시로, 시골로 먹고 살길을 찾기 위해 분주히 이동했고, 그런 몸부림들도 한국이 일군 ‘경제 기적’에 나름의 몫을 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틀을 걸어 도착했던 새로운 삶의 터전

군위군의 ‘화산마을’은 소위 뜬 지 몇 년 되지 않은 지역이다. 7.6km의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야 만날 수 있는 마을은 산성보다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제일 높은 곳에 있는 풍차 옆에 서면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군위댐이 발밑이다. 화산마을에서 촬영한 새벽 풍경을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에 올려놓은 군위 사람이 적지 않다. 화산마을의 새벽을 사진에 담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자랑으로 여기는 분위기다.화산마을은 개척촌이다.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산지개간정책에 따라 180여가구가 집단 이주해 마을을 형성했다. 당시 마을에 들어왔던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1962년 신령역에 내려 꼬박 이틀을 걸어서 지금의 마을 자리에 도착했다. 대부분 가난하거나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었고, 의지할 데라고는 이웃밖에 없었다. 손에 들린 연장은 삽과 괭이, 톱이 전부였다. 해발 700미터의 산속, 기계의 힘은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오로지 몸으로 거친 산간을 개간해 농작물을 심었다. 그렇게 빽빽한 산림 사이에 원형탈모 같은 개간지를 만들고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 60~70년대, 모두 힘들고 어려웠지만, 맨손으로 산에 들어와 화전을 일구어야 했던 이들의 일상에 비할 수 있을까.마을의 일부였으나 대부분의 주민에게는 안중에도 없었을 시원한 전망과 맑은 공기, 사계절을 따라 하루하루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풍경은 어느새 마을의 거의 전부가 되었다. 눈물 어린 개척장소는 이제 마음의 쉼터가 되었다. 그 사이 세상이 변한 것이다. 마을에는 도둑 천지다. 세상사 모두 잊고 자연에 묻히고 싶은 이들이 도둑처럼 몰래 마을로 올라와 마음에 풍경을 하나씩 훔쳐간다. 프로필 사진으로 쓰기도 하고 언제고 다시 올 수 있는 곳이라는 사실 자체를 위안으로 삼으며 일상이 팍팍해질 때마다 마음속에 쟁여둔 마을 풍경을 초콜릿처럼 ‘꺼내 먹는다’. 먹고 살길을 찾아 이틀 길을 걸어 나무와 풀, 산짐승밖에 없는 산속으로 들어오던 시절의 참담한 이야기는 희미한 추억이 되고 역사가 되고 전설이 되었다. 산도 그 자리에 있고, 풍경도 그대로인데 세월만 바뀐 것이다. 이제 화산마을의 주된 정서는 절박함과 생존이 아니라 힐링이다.


화산마을이 전하는 위로

코로나19가 2년째 늘어지고 있다. 소상공인들의 비명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지만 뜻밖에도 자영업자 수는 오히려 늘었다. 그렇게 장사가 안 된다고 곡소리를 내고 있는데 왜 숫자가 늘어난 걸까? 이유가 참담하다. 더 이상 떠날 곳이 없기 때문이란다. 매출이 줄고, 빚이 급증했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으니 앉은 자리에서 쓰러져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코로나19 시대에 화산마을이 희망의 메시지가 될 수 있을까. 삶의 벼랑에서 땀과 눈물로 하루하루를 채우던 ‘개척의 시절’은 저물고 어느 사이 도시에서는 찾을 수 없는 소소한 행복이 그득한 낭만의 공간으로 변했다. 빚의 나락에 떨어진 소상공인들, 머나먼 타국에서 고향에 남은 가족을 그리워하며 일터로 나서는 외국인 노동자, 꽁꽁 얼어붙은 채용 시장이 어서 봄바람이 불기를 기다리는 청춘들에게 화산마을의 고즈넉한 풍경에 작은 위로가 되기를. 사람의 나이로 치면 육십, 어느덧 노년기에 접어든 화산마을이 길손들에게 나지막이 속삭인다.‘이 또한 지나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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