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곧 망할 조합이라고 수군댔지만 궁하면 통하더군요”

  • 입력 2021.11.01 00:00
  • 수정 2021.11.25 17:56
  • 기자명 김광원기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김진열 군위축협조합장이 20년 가까이 군위축협을 이끌면서 펼친 다양한 사업과 성과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조합이 망하면 자네 일자리도 없어져. 생각 잘하게.”


2000년 즈음, IMF 외환위기의 여파가 아직 한창이던 때였다. 경북 군위축협 조합원들이 40대의 젊은 상무 한 명을 찾아가 조합장 선거 출마를 종용했다. 농축협이 통합 과정을 밟으면서 기존의 조합장이 자격 미달로 낙마해 조합장 자리가 공석이었다. 조합의 몇몇 어르신들이 그를 차기 조합장으로 낙점했다. 처음에는 “적임자는 자네뿐이네”하고 고운 말로 시작했으나 상무가 고사를 거듭하자 “조합이 사라지면 실업자 신세가 될 것”이라며 반 협박조로 나왔다. 어르신들 말마따나 금융위기 이후 전국의 “곧 망할 조합이라고 수군댔지만
궁하면 통하더군요”
김진열 군위축협조합장이 20년 가까이 군위축협을 이끌면서 펼친 다양한 사업과 성과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조합이 앓는 이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군위처럼 작은 조합은 내일 당장 쑥 뽑혀도 이상할 게 없었다. 실제로 농축협이 통합된 이후 부실채권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대구 경북에 있던 30여개 축협 중 10여 개가 분해됐다.
“자네 같이 유능한 사람이 조합장 자리를 지켜야 군위축협이 버틸 수 있어.”
40대 상무는 결국 출마를 선언했다. 당시 그의 나이 43세로 최연소 조합장이었다. 이후 6번 내리 조합장 연임에 성공했다. 김진열(61) 군위축협 조합장의 이야기다. ‘내 일자리 구하기’로 시작해 20년 동안 김 조합장이 거둔 성과는 놀랍다. 농협중앙회가 매년 실시하는 종합경영평가에서 2021년까지 14년 연속 1등급을 획득했고, 대구경북 농축협 최초로 10년 연속 클린뱅크에 선정되기도 했다. 클린뱅크를 10년째 거르지 않고 달성한 경우는 1,118개 중 10개에 불과하다. 농협중앙회 퇴비품평회 전국 최초 3개년 수상 사업장의 영예에 김 조합장이 받은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표창까지 더하면 올해만도 4관왕이다. 금융위기와 구조조정으로 없어지느냐 마느냐의 기로에까지 섰던 조합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다.

◇ 고3 마지막 수업에 배운 교훈 ‘궁즉통’
시작은 막막했다. IMF라는 국난의 와중이었다. 그 이전까지 ‘안 되면 되게 하라’는 정신으로 경제를 일으켰으나 IMF와 당시의 한국 정부는 기업들에 시퍼런 칼날을 들이대고 ‘안 되면 죽으라’고 강요했다. 그렇다고 죽을 수는 없었다. 눈앞의 숙제부터 풀어나갔다. 부실채권을 정리하는 일이 시급했다. 조력자가 필요했다. 그는 의성으로 향했다. 의성축협에 전무로 있던 선배를 찾아가 군위로 와달라고 부탁할 참이었다. 삼고초려를 각오했다. 당시 의성축협은 1등급 조합이었고, 연봉도 군위보다 높았다.
“그러지. 김 조합장이 부탁하는데 내가 안 따를 수 있나.”
선배에게 도와달라는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군위로 오겠단 답이 돌아왔다. 선배는 10년 남짓 근무하던 직장에 과감하게 사표를 던지고 연봉 차감을 감내하면서까지 군위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 김 조합장의 뇌리를 스친 기억이 하나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마지막 수업에서 세상으로 나가는 제자들에게 전해주었던 문장 하나였다. 선생님은 “살아가면서 이것만 명심하면 어떤 난관이든 이길 수 있다”면서 칠판에 한자 세 글자를 썼다.

‘窮則通’

궁즉통. 궁하면 통한다, 극단의 상황에 이르면 도리어 길이 열린다는 뜻이었다.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첩첩이었지만 선배의 합류로 구들장 같은 하늘에 틈이 벌어지는 느낌이었다.


◇ 조합이 살기 위해선 돈을 벌어야 한다!
이제 본격적으로 살길을 찾아야 했다. 해답은 간단했다. 비용을 절감하고 돈이 되는 사업을 창출하는 것이었다. 우선 조합에서 자체 사료를 만들었다. 기존에 쓰던 농협 사료는 거품이 많이 끼어 있었다. 게다가 조합 규모가 작아 장려금 혜택도 거의 없었다. 농협이 사료를 많이 구매하는 조합에는 더 많은 장려금을 지급한 까닭이었다. 사료 공장과 직접 협약을 맺고 OEM 생산을 추진하자 농협 담당자가 볼멘소리를 했지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다 듣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조합에서 직접 사료를 관리하자 품질도 좋아졌다. 나중에는 조합원뿐 아니라 다른 조합의 양축가들도 군위축협 사료를 쓰기 시작했다. 가격과 품질을 모두 잡아낸 사례가 되었다.
신규 사업도 필요했다. IMF 이후 소값이 바닥을 쳤고, 낙농업도 초토화되다시피 한 상황이었다. 그때 육우가 눈에 들어왔다. 육우가 한우 시세의 60%밖에 안 됐으나 당시 젖소 송아지는 담배 한 보루만 건네면 가져올 수 있었고, 한우와 비교해 깊은 맛이 떨어진다고 해도 성장 기간이 한우와 비교해 10개월이나 짧았다. 여기에 한우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거나 차별화가 어려웠지만 육우는 발전 가능성이 크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조합에서는 회의적이었다. 군위조합에 흔쾌히 합류했던 선배마저 김 조합장을 말렸다.
“잘 되면 본전, 잘 못 되면 조합장 끝이다. 너무 무모하다.”
그때 김 조합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다른 걸 해서 조합을 끌고 갈 수 있다면 하겠습니다. 하지만 아이템이 없지 않습니까. 조합장 잘리더라도 해봐야겠습니다. 안 하고 죽는 것보다야 해보고 죽으면 후회는 없을 것 아닙니까.”


◇ 육우사업 시작부터 난관... 불현듯 나타난 구원투수
첫번째 난관은 사료였다. 한우보다 성장 속도가 빠른 만큼 사료도 고열량이 필요했다. 문제는 국내에 육우 전용 사료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살길은 있었다. 경산에 있는 ‘목산한우연구소’에서 구원 투수가 등판했다. 소장으로 있던 정근기 박사가 일본에서 학위를 받은 일본통이었다. 일본에는 육우를 활발하게 생산하고 있었다. 그의 도움으로 육우 프로젝트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프로젝트의 핵심은 사육 기간을 줄이고 고기의 질을 높이는 것이었다. 1년 반에 걸친 시험 사육으로 육우 생산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쉽게 말하면 생산비를 줄이고 등급을 올리는 기술이었다. 목표는 성장기를 2개월 단축시키고 고기의 질과 관련해 일반 농가에서 키우는 육우와 비교해 2등급 이상의 고기가 2배 넘게 나오도록 하는 것이었다.
시험 결과는 놀라웠다. 시장 시세에 따라 가격 변동이 있긴 했으나 평균적으로 소 한 마리당 생산 원가를 30만원, 성장 기간을 2개월이나 줄였고, 수익을 30만원 이상 높였다. 2005년에서 2010년 사이에 거둔 성과였다.
단 하나 해결되지 않는 것은 육우에 대한 인식이었다. 육우를 한우로 속여 파는 정육점이 적발되면서 육우를 기피하는 농가가 많았다. “육우 때문에 한우가 피해를 본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고, 심지어 조합원 중에도 “육우 키우는 꼴은 못 보겠다”면서 조합을 탈퇴하는 사람까지 생겼다. 어쩔 수 없었다. 인식의 변화는 시간이 필요했다.

◇ 대한민국 육우 중 군위 육우 점유율 12%
2010년 즈음 또다시 변고가 생겼다. 구제역이 터졌다. 2015년 되어서야 겨우 진정됐다. 한우 육우 할 것 없이 숨죽이고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에 시간이 쌓였고 육우에 대한 인식도 서서히 변했다.
고기의 질도 계속 높였다. 가격과 품질 면에서 육우는 한우와 수입육의 중간쯤으로 본다. 열심히 노력한 끝에 수입육과의 차이를 더 벌릴 수 있었다. 2017년 조사 결과 일반 농가에서 2등급 이상 고기의 비율이 50%였던 반면, 조합원들이 생산하는 육우는 2등급 이상이 80%에 달했다. 타지역과 비교해 한 마리당 100만원이 넘는 소득 차이가 났다.
생산량도 늘었다. 이 땅에서 생산되는 육우 중 12%가 군위축협산이다. 김 조합장에 따르면 전국적인 명성을 가진 농산물의 경우도 한 지역에서 5%이상을 차지하기 힘들다. 12%는 말 그대로 획기적인 점유율이다.
유통을 체계화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과다. 육우는 소위 ‘얼굴 없는 고기’로 통했다. 깜깜이 유통 때문이었다. 군위축협은 축협이 만든 판매장에서 팔거나, 축협에서 직접 가공해서 소매상에게 납품하거나 온라인으로 판매하고 있다. 군위축협의 유통 시스템은 현재 육우 유통의 기준으로 자리잡았다. 점유율이 12%에 이르는 만큼 다른 지역에서도 주목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김 조합장은 “조합장 자리를 걸고 추진한 사업인데, 생산에서 판매까지 모두 좋은 성과가 나와서 너무 기쁘다”면서 “함께 뛰어준 전무님을 비롯해 조합 식구들의 노고 덕분이다”고 말했다.
처음 조합장에 당선되었을 때 ‘딱 세 번’을 결심했다. 최대 세 번만 조합장을 하고 내려오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조합원들의 설득과 ‘협박’으로 6번, 20년 넘는 세월 동안 맨 앞에서 총대를 메고 갖은 풍파와 싸웠다. 강산이 변하는 그 세월 동안 깨달은 바가 하나 있다고 했다.
“궁즉통의 의미입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가슴에 새기고, 조합장을 처음 시작할 때 금과옥조로 삼았던 바로 그 교훈이었다.
“최근 어느 강연에서 궁즉통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그저 궁하면 통할 길이 온다는 의미쯤으로 알고 있었는데 더 깊은 뜻이 있더군요. ‘궁’과 ‘통’ 사이에 변화의 몸부림이 있어야 한다더군요. 궁하면 죽을 각오로 변해야 한다는 설명이었죠. 돌이켜 보니 제가 바로 그랬더군요. 조합장직 아니라 조합의 운명을 걸고 변신하고 또 변신했거든요. 결국 과감한 도전이 답이더군요. 육우에 매달려 달려온 20년 세월이 제게 가르친 세상의 이치입니다.”

저작권자 © 대구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