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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공무원 선발을 위한 필기시험에 반대했을까

  • 입력 2021.10.12 00:00
  • 수정 2021.10.29 15:23
  • 기자명 유명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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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정치판에서 가장 큰 뉴스를 꼽으라고 하면 이준석이 빠지지 않을 것이다. 보수정당의 특성상, 젊다는 것 자체가 결격 사유가 될 법도 한데 그걸 모두 돌파하고 대표 자리를 꿰찼다는 게 놀라운 일이다. 2030세대가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지난달이 취임 석달째를 돌파했다. 대표로 있으면서 가장 아쉬웠던 점을 묻는 질문에 인상깊은 멘트를 남겼다.

“지난 100일 동안 물 위로는 크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제가 제안했던 변화 중 가장 많은 조직적 저항에 부딪혔던 것은 공직후보자 기초자격시험이었다.”
거칠게 말하면 시험에 대한 저항인데, 이것은 역사에서 꾸준히 반복되어온 현상이다. 아직도 ‘낙하산’ 문제가 심심찮게 대두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시험을 통한 인재 선별은 늘 기득권의 반발을 사기 마련이었다.

세계를 놓고 보면 최초의 필기 시험은 과거제였다. 우리나라는 신라의 독서삼품과로 필기시험이 시작됐다. 고려시대에 과거제가 도입되기는 했으나 옛 채용법을 그대로 이어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시험 제도뿐 아니라 어느 시대나 옛 제도가 더 정당하고 효과적이라고 믿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새로운 제도가 정착되기 전까지는 늘 이전 방식이 좋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고려시대는 상대적으로 시험 이외의 방법으로 관리가 되는 방법이 많았다. 심지어 조선시대에도 음서제도가 있었고, 또 전쟁에서 공을 세우거나 하는 등의 방법으로 벼슬에 나가기도 했다. 고려는 (당연히)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이 ‘수저’ 덕을 봤다. 가문의 뒷배나 인맥으로 한 자리를 꿰찬 사람들에게 시험 출신은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업무 역량이나 업적도 수시로 비교당했을 것이다. 과거제가 도입된 이후에도 조정에서 가장 큰 세력은 황보 지역의 황씨와 신라 6두품 출신들이었다.

그 시기 가장 대표적인 ‘시험 출신’은 서희였다. 서희의 활약으로 강동6주를 얻은 뒤 왕과 대신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역시 시험 출신은 다르네!”서희의 성과는 시험 출신의 위신을 한껏 높였다. 서희의 활약은 시험 출신들의 약진을 상징한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1009년(목종 12)에 왕(목종)을 몰아내는 정변이 일어났을 때도 과거 출신들이 주축이었다. 그렇게 시대가 서서히 변해갔다.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1868년에 의회에 ‘공무행정개혁보고서’란 것이 제출됐다. 간단하게 말하면 공무원을 필기시험으로 뽑자는 것이었다. 868년도 아니고, 1868년에 필기시험 도입을 두고 ‘개혁’이고 한 것 자체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이었다. 미국은 이때까지도 무시험으로 공무원을 선발했다.

시험 이야기가 나오자 강력한 반발이 뒤따랐다. 당시만 해도 의원들은 관직을 돈으로 팔거나 친분이 있는 사람들에게 ‘제공’했다. 이런 특권을 내주긴 싫었던 것이다. 반대 논리도 꽤 치밀했다.

우선 필기시험의 원조는 중국이다. 이것이 가장 결정적인 문제였다. 그들은 ‘중국은 1842년 아편전쟁 패배로 ‘종이 호랑이’로 판명이 났다, 그런 형편없는 나라의 채용 시스템을 도입한다니, 말도 안 된다’는 논리를 펼쳤다.

그러나 필기 시험은 이미 대세였다. 다른 나라에서 이미 필기시험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과거 제도의 영향을 받아서 프랑스가 1791년에 공무원임용고시를 도입했고, 독일은 1800년경, 영국은 1870년 즈음에 공무원임용시험을 제도화했다. 필기시험은 시대의 대세였던 것이다. 결국 공무 행정개혁 보고서는 1883년에야 어렵사리 통과되었고, 이로써 영국의 공무원임용고시제에 근간을 둔 미국 공무원고시제가 마침내 제도화됐다.

지식을 정확하게 시험하는 걸 반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경험, 경륜 같은 것을 언급한다. 나이를 내세우는 것이다. 통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만의 노하우, 오랜 통치 경험에서 오는 감각 따위가 탁월하다고 믿었다. 이를테면 신성로마제국의 초대 황제 샤를마뉴는 문맹이었다. 47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지기스문트(1433~1437)는 자신이 쓴 라틴어 문장을 들고 문법적으로 지적을 받고 이렇게 대꾸했다.

“짐은 로마의 왕으로 문법을 초월해 있소이다.”
말은 그럴싸한데 한 마디로 무식했던 것이다. 중세를 암흑시대라고 하는데는 통치자들의 무식이 한몫했다.

어떻게 시험을 진행하느냐도 중요하다. 난이도가 핵심 중의 하나다. 필기 시험에서 난이도 조절에 실패하면 심각한 문제를 불러온다. 강경법이란 시험법이 있었다. 과거에서 시험관 앞에서 사서오경 중 한 부분을 읽고 해석한 뒤에 시관의 질문에 대답하는 과목이었다. 이게 무척 어려웠던 것 같다. 조선조 기틀을 마련하는데 기여한 경세가로 평가받는 변계량(1369~1430)은 “초장에서 강경을 하도록 법을 개정하였더니, 이로 말미암아 영민하고 예기(銳氣)있는 쓸 만한 인재가 모두 무과로 달려갔다”고 주장했다. 너무 어려운 시험이 인재를 쫓아내는 난관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옥석을 가리는 수단이 아니라 시험을 위한 시험으로 전락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가장 적절한 난이도를 찾는 것은 일단 시행된 이후의 일이다. - 이준석식 테스트는 공언한 바를 보면 난이도가 그리 높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 시대의 화두는 공정과 투명한 일처리다. 앞으로도 이런 류의 일들이 빈번하게 시도될 것이다. 정치가 보다 투명해지길 바라는 것은 시대적 요구이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 하루라도 빨리 ‘무조건 하던 대로 하는 게 최고’라는 미몽에서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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