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한국일보 : 아름다운 사람들의 아름다운 이야기
칼럼
지난 일을 떠올리며 혼자 조용히 웃는 것
이진숙 전 '클럽리' 대표  hankookd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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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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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바라만 보아도 배가 부르고, 생각만 해도 입꼬리가 올라간다. 곁에 없으면 눈에 삼삼하고 귀에도 삼삼하다. 그의 사진과 동영상을 휴대폰 갤러리에 잔뜩 저장해 놓았다. 볼 때마다 내 눈길은 그윽해지고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진다. 아무리 봐도 지루하지가 않다. 사랑에 빠진 거다.
그는 자동차를 몹시 좋아하고, 무지개와 하트도 좋아한다. 단단하고 또렷한 목소리는 무척 매력적이고, 높고 가는 웃음소리는 “짹짹짹” 새소리 같다. 기분이 좋으면 아래턱을 살며시 앞으로 내밀어 주걱턱을 만드는 버릇이 있다. 잘생긴 얼굴이 금세 우스꽝스러워지지만, 바라보면 나까지 기분이 좋은 건 어째서일까.
고백하건데 다섯 살짜리 손자 얘기다. 미국에 사는데 잠시 한국에 왔다. 사진과 영상으로 볼 때보다 직접 만나니 훨씬 더 사랑스럽다. 손자가 없는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거다. ‘얼마나’ 예쁜지도 모를 거고, ‘정말로’ 예쁜지도 모를 거다. 손자가 있는 할머니가 어떤 기분인지는 진짜 손자가 있는 할머니가 말해줘야 한다.
손자는 그냥 예쁜 아이가 아니다. 그러나 구석구석 예쁘지 않은 데가 없다. 틈만 나면 부둥켜안고 싶고, 궁둥이를 톡톡 두드리고 싶고, 심지어 ‘앙’하고 깨물고 싶기도 하다. 훌쩍 커 버릴까봐 아까울 지경이고, 얼른 친해지고 싶어 안달이 날 정도다. 내심 그에게 잘 보이고 싶어지고, 그가 기뻐할 일을 찾게 된다. 영어를 배우고 싶은 이유가 ‘미국에 사는 손자와 이야기하기 위해서’란 사람을 드디어 이해하게 된다.
포도를 주면 “할미, 못 본 척해”하고는 감쪽같이 먹어버리는데, 나는 못 본 척 연기하며 깜짝 놀란 표정으로 “아니, 그 많던 포도가 다 어디 갔지?”라는 대사를 외치면서 행복해진다. 슬픈 곡조가 돌연 신나는 곡조로 바뀌는 동요를 들으면서, 둘이 똑같이 슬픈 얼굴이 되었다가 곧바로 몸을 흔들면서 행복해진다. 귀여운 목소리로 “할미~”하고 부르면 나는 두 눈이 가늘어지면서 행복해진다. 두 팔로 그를 꼬옥 안으면 내 가슴이 따스해지면서 행복해진다.
그게 다가 아니다. 그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내내 분주해서 아무 일도 못하게 한다. 숨바꼭질을 하자고 하고, 같이 그림을 그리자고 하면서, 숨 돌린 틈도 주지 않는다. 장난감 차를 몰고 따라오라 할 때는 늙음을 실감하게 한다. 종일 정신을 쏙 빠뜨리고 쩔쩔매게 한다. 힘들고 고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러다가도 잠들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잊어버리게 되니 신기하다.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게 되고, 잠옷에 손을 넣어 등을 쓸어내리게 되고, 이불을 덮어 토닥토닥 하게 된다.
손자는 예기치 않은 기쁨으로 나를 활짝 웃게 하고, 시들어가는 내 마음을 꽃처럼 활짝 피어나게 한다. 내 하루를 생기가 넘치게 만들어준다. 곁에 있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어서 더 행복하다. 특별한 곳에 가지 않아도, 대단한 것을 하지 않아도, 그저 지금 여기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사랑한 순간들은 짧아서 소중하다. 아름다운 시간들은 돌이킬 수 없어서 애틋하다. 곧 사라질 거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무척 아쉽다. 덧없이 사라져가는 시간들을 마음에 새겨두고 오래 간직하고 싶다. 부지런히 모아 가슴에 쌓아놓고 더 많이 기억하자고 다짐한다. 두고두고 꺼내보기 위해 잊고 싶지 않은 순간들을 기록한다.
알렝 드 보통은 ‘소소한 즐거움’에서 “할머니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저 당신이 존재하는 것에 감사하는 게 할머니 마음이다. 그것은 아무런 계산도 사사로운 욕심도 없는, 당황스러울 만큼 순수한 사랑이다”라고 했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내 마음과 내 사랑이 마치 할머니에게 주는 특별한 선물 같다.
손자가 떠난 후에도, 손자가 다 큰 후에도, 내 사랑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그를 생각할 때마다 ‘지난 일을 떠올리며 혼자 조용히 웃을 것’ 같다. 이렇게 말해주면 손자가 없는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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