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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화 정신을 후세에게 전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죠”

  • 입력 2021.10.05 00:00
  • 수정 2021.10.29 09:21
  • 기자명 김민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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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마음이 외면당하면 힘들다. 낙담(落膽). 말 그대로 마음이 땅에 뚝 떨어진다. 사는 맛이 없어진다. 몰라주는 정도를 넘어 혹평과 비난의 대상이 된다면 어떨까? 마음은 땅 밑까지 내려갈 것이다.

박언휘 이사장에게 2020년과 2021년이 꼭 그런 해였다. ‘슈바이처’로 통할 만큼 봉사하는 의사로 알려진 데다 틈틈이 글을 써서 책을 내는 작가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그에게 ‘이상화기념사업회’ 이사장직이 운명처럼 다가왔다. 처음에는 고사했으나 문화계와 지역 오피니언 리더들의 적극적인 추천과 권고가 있었다. 고심 끝에 이사장직을 받아들였다. 이상화라는 이름의 무게도 크게 작용했다. 민족을 대표하는 시인이었고, 그가 남긴 시와 다양한 삶의 흔적은 대구가 자랑하는 문화유산이다. 시민에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이사장직을 수용해 나름 기념사업회 발전을 위한 청사진까지 그렸다.

두려움 반, 설렘 반의 시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송에 휘말렸다. 소송의 요지는 박 이사장을 선출한 9월 임시 이사회가 무효라는 것. 소송을 제기한 측은 “임시 이사회를 소집한 전 이사장이 이미 사퇴를 했기 때문에 소집 권한이 없고, 의사 정족수가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 선임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무효”라고 주장했다. 이에 기념사업회 측은 “전임 이사장이 신임 이사장 선출을 전제 조건으로 했고 반대파의 주장과 다르다. 재적이사 과반 이상이 참여해 의사정족수가 충족됐다”고 맞섰다. 법원은 결국 기념사업회 이사회의 손을 들어줬다. 그렇게 지역 대표 시인의 이름을 걸고 모인 기념사업회 내부에서 벌어진 불미스러운 소동이 일단락되었다.
이 과정에서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가장 고통을 받은 인물은 ‘선의의 피해자’ 박 이사장이었다. 박 이사장을 만나 그간의 숨겨진 사연과 마음에 쌓인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다음은 박 이사장과의 일문일답.

- 모든 게 끝났다. 지금 심정은?
진실이 외면받는 현실이 암담했다. 무엇보다 문학기념관 사업에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했던 회원들이 오해를 받는 것이 제일 힘들었다. 특히 익명으로 물질적 지원을 했던 이들까지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이는 것을 보면서 숨이 턱 막혔다. 대구 최초의 문학기념사업관이 무산되는 것을 막자는 일념으로 사비를 털어가면서까지 진실을 밝히는 일에 매진했다. 일제 치하에서 나라를 빼앗긴 설움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 이제부터는 이상화기념사업회의 진행에 매진할 것이다. 이상화 선생은 시를 통한 국민계몽운동으로 독립운동에 대한 열망을 심어주신 분이다. 이상화기념사업회가 당신의 뜻을 받들어 국채보상운동 같은 나라사랑 운동을 이어갈 수 있는 사업을 펼쳐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 이런 사태가 벌어진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명예욕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기 명예가 아닌 것을 탐하면 안 된다. 그러나 그런 이들은 일부에 불과했다.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이상화기념사업회와 관련된 구성원들 대부분이 조건 없는 재정과 재능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익명으로 지원을 하는 이들도 많았다. 특히 익명의 지원자들이 거짓말쟁이로 몰렸지만 법원에서 누명을 벗겨줬다. 생각할수록 다행이다. 순수한 열망을 가진 분들이 존중받는 이상화기념사업회로 만들어갈 것이다.

- 향후 이런 사태가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또 다른 혼란을 막기 위한 조치를 했는지 궁금하다.
이 같은 상황이 또다시 벌어지면 절대 안 된다. 기념사업회 정관을 바꿔 구성원들에 대한 심사와 자격요건, 인사와 징계에 대한 절차를 강화할 것이다. 머릿수로만 의사결정을 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절절하게 느꼈다. 뜻 있는 분들의 한표가 존중받아야 한다. 임원들의 권한 대행과 견제를 위한 이사회의 역할을 강화하겠다.

- 이상화 기념사업회도 일종의 사회봉사다. 기념사업회가 내홍을 겪으면서 기념 사업이 주춤했다. 밀린 숙제가 많을 것 같다.
1년 넘게 기념사업이 중단되었다. 조직정비와 함께 회원 자격도 강화하고 기념사업회의 목적인 교육사업에 매진할 것이다. 교육을 통해 애국심과 감성지수를 높여 사회를 사랑하고 나누는 마음의 습관과 열정을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 교육청과 손잡고 창작대회 등 여러 가지 활동을 이어가는 것이 급선무다. 초등학생부터 성인까지 전 과정을 만들고 싶다. 대구시와 교육청의 관심이 여느 때보다 필요하다.

- 기념사업회 이전에 가장 주목받는 오피니언 리더이자 활동가 중의 한분이다. 박언휘 이사장 개인의 이름값이 보통 의사 이상이다. 기념사업회 측에서 이사장으로 추대한 이유가 평소의 봉사정신 때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봉사나 나눔에 있어 대가를 바라면 안 된다. 이상화 선생의 정신과도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 특히 자라나는 세대에게 애국심과 공동체 의식까지 심어주어야 한다. 이상화 선생이 평생토록 견지한 정신적 태도를 가르치는 것이다. 기념사업회는 이상화 선생의 정신을 계승하고 후대까지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다.
나는 의료인으로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서 일해왔다. 이상화 선생이 이루신 업적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다만 하루하루 마음을 새롭게 하고 공동체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고 애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는 점이 스스로 자랑스럽다. 앞으로도 의술과 나눔을 통한 사회기여를 끊이지 않고 이어가고 싶다.

- 평생토록 봉사하도록 한 원동력은 무엇이었나?
울릉도에서 태어나 의과대학을 졸업하는 그날까지 순탄한 인생은 아니었다. 젊은 시절, 화려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남모르는 설움과 어려운 과정을 두루 겪었다. 특히 대학교 때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등록금이 없어 2년 동안 휴학을 하면서 돈을 벌었다. 그 2년 동안 사회의 어두운 면과 아픈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봤다. 그때 정신적으로 진짜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직접 목격하고 깨달은 우리 사회의 부조리와 암울한 부분을 결코 잊지 않고 살겠다고 결심했다. 그 시절의 결심을 지금까지 놓지 않고 살아왔다. 스스로 대견하다. 그리고 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 그 과정에서 젊은 시절의 아픔과 트라우마도 자연스럽게 치유됐다.
사족을 달자면 어릴 때 아버지가 사준 위인전 ‘슈바이처’를 읽은 것도 큰 도움이 됐다. 그분의 삶은 나의 롤모델이다.

- 가장 기억에 남는 봉사가 있다면.
열심히 진료하는 것이 내 첫 번째 봉사라고 생각했다. 그래 그런지 내가 진료를 하면 잘 낫는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환자의 마음을 이해하고 진심으로 대했기 때문인 것 같다.
기억 남는 환자를 꼽자면 20대에 보건소장으로 일하던 시절에 만난 장애인이었다. 내 또래였고 하반신을 움직일 수 없는 분이었다. 어느날 하반신에 크게 화상을 입고 찾아왔다. 남자는 여자가 치료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보였지만 정성을 다해 치료했다. 화상이 깨끗하게 치료되자 나중에 진심이 담긴 손편지가 오기도 했다.
봉사활동을 하다 장애우들의 어려운 처지를 알게 된 후 그냥 있을 수 없어 대구에서 장애인협회와 장애인인권협회를 만드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80년대의 일이다.

- 의사 이상의 의사라는 생각이 든다. 궁극적인 삶의 목표는 무엇인가.
사회는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다. 다 같이 행복하고 나눔을 통해 살아간다면 사회적 문제로 인한 범죄도 줄어들 것이다. 일반인들도 나눔과 봉사를 통해 사회적 감성을 치료할 수 있다. 의사 이상의 인술을 펼치기 위해 시집과 잡지를 꾸준히 출간, 사회적 간접치료를 이어가고 있다. 나눔과 봉사는 사회적 치유법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이들이 사회적 치유 의사가 될 수 있도록 살아가겠다.

- 이상화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서 혹은 의사 박언휘로서 시민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얼굴을 드러내는 봉사와 기부는 자칫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에 더더욱 청렴결백해야 한다. 살면서 많은 일이 있었지만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한 적도 없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다면 오해가 있어도 결국 진실은 드러나게 되어 있다.
사회구성원들도 의식이 깨어있어야 올바른 시각을 가질 수 있다.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아름다워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사회지도층이나 일부 리더가 아닌 모든 이들의 인식변화와 노력이라는 것이 알려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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