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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슈퍼스타 운심그를 키워낸 밀양은 어떤 도시?

  • 입력 2021.10.01 00:00
  • 수정 2021.10.28 17:17
  • 기자명 김광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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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남루. 고려 말에 절터 위에 처음 지었다. 임진왜란 때 화재를 겪은 후 1844년에 다시 세워졌다.


“이보게, 자네 춤 솜씨 한번 보려고 이렇게 몰려왔네.”

궁에서 각종 행사를 담당하는 관리와 왕의 사위 등이 기생집에 몰려왔다. 기생의 이름은 운심, 그는 검무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남자들이 그에게 춤을 청했으나 운심은 선뜻 칼을 들지 않고 앉은 자리에서 뭉그적대고만 있었다.
박지원(1737~1805)이 쓴 ‘광문자전’에 담긴 이야기다. 작가는 거지 패거리의 두목이자 조방꾼이었던 광문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으나 글 말미에 등장하는 운심도 광문 못잖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기생이라고 하면 천민으로 분류되던 계층이었다. 궁에서 온 사람들 앞에서도 나름의 고집을 꺾지 않았던 운심에겐 한 시대를 풍미한 예인다운 기개와 자존심이 느껴진다.
운심의 생몰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영조 임금 때 사람이라는 것 정도만 알려져 있다. 전국에서 이름을 떨쳤지만 원래 서울 사람은 아니었다. 지방에서 검무 실력을 인정받아 선상기(나라의 큰 잔치가 있을 때에 각 지방에서 뽑아 올리던 기녀)에 뽑혀 서울로 올라갔다. 검무로 명성을 얻은 뒤 서울은 물론이고 전국 각지에 제자를 뒀다. 실학자 박제가는 1769년 묘향산을 유람하다가 운심의 제자가 펼치는 검무 공연을 관람한 후 깊은 감명을 받고 이를 글로 남기기도 했다.

◇ 박시춘과 월견초의 고향 밀양
운심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부분은 그의 검무가 밀양에서 이미 완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예나 지금이나 서울은 정치와 문화, 경제의 중심지다. ‘시골’ 밀양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전국을 휘어잡는 무용과 무용가가 탄생했을까. 일제강점기 이동백, 이화중선 등의 명창들이 이 인근을 방문하면 반드시 들렀던 권번이 있었고, 그 권번 주인의 아들(박시춘)이 ‘굳세어라 금순아’ 같은 명곡을 탄생시켰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저 어쩌다 탄생한 유별난 인물이라고 단정짓긴 아쉽다. 이 둘 사이의 시대적 거리가 멀긴 해도 이런 문화적 현상을 뒷받침하는 바탕이 존재했을 것이다.

이런 현상을 이해하는 코드 중의 하나가 ‘영남루’일 것이다. 영남루는 평양의 부벽루, 진주의 촉석루와 함께 조선 후기 3대 누각으로 통한다. 통상 누각에서 다양한 공연이 펼쳐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세 지역 모두 공연 예술이 가장 활발했던 지역이라고 해도 무방해 보인다. 영남루는 19세기에 지금의 규모와 모습으로 새로 지어졌고는 하지만, 이만한 누각을 탄생시킨 바탕이 존재했을 것이다. 밀양이 가진 경제 규모나 예능적 자질이 조선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누각을 탄생시킨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사족을 달자면 3대 누각이 있던 곳에선 근대 들어 골고루 걸출한 예인들이 탄생했다. 평양에서는 근대 최초의 대중가요 스타인 왕수복이 나왔고, 진주는 가요황제 남인수, 밀양은 박시춘을 배출했다. ‘청춘을 돌려다오’, ‘대동강 편지’ 등 300여편의 노랫말을 남긴 월견초(본명 서정권)도 밀양 출신이다.

◇ 조선 후기 ‘거대한 세곡 창고’ 자리로 낙점된 밀양
밀양이라는 지역이 화제의 중심에 오른 적이 있다. 대구통합신공항 이전지로 주목되면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밀양의 삼랑진 인근이 경상도 동남쪽 지역 중에서 지리적으로 사람과 물자가 모이기 용이한 곳이라는 판단이었다. 결국 좌절되고 말았지만 삼랑진이 사람과 물자가 모이기 용이한 지역이라는 것은 충분히 증명되었다.
삼랑진의 지리적 이점은 벌써 300여년 전에 인정을 받았다. 바로 운심이 살았던 영조(재위:1724~1776) 임금 때의 이야기다. 임진왜란 이후 배를 이용한 운송이 활발해지자 조정에서는 배로 조곡을 실어날랐던 옛 제도를 부활시켰다. 마산과 가산(사천)에 좌조창과 우조창을 열었다. 두 조창에는 조운선이 각각 20척씩 배정되었다. 조운선에는 통상 300석에서 800석의 쌀을 실을 수 있었다. 1403년 조운선 34척이 풍랑을 만나 침몰했는데, 사람 1,000여명이 죽고 곡식 1만여 석이 물에 잠겼다. 조창에 쌓이는 쌀과 조운선으로 실어나르는 곡식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그런데 막상 조창을 열고 나니 문제가 생겼다. 두 조창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사는 백성들 사이에서 조창이 너무 멀어서 힘들다는 불평이 터져나온 것이었다.
“세곡을 안 낼 수는 없고, 세곡보다 운반비가 더 많이 들겠네.”
머리를 맞댄 결과 삼랑진에 새로운 조창을 짓기로 했다. 1765년에 들어선 삼랑창은 두 조창에 비해 몇 해 늦게 들어섰다고 해서 후조창이라고도 불렸다. 이 새로운 조창에는 15척의 조운선이 편성되었다.

◇ 김해는 예나 지금이나 찬밥
재미있는 점은 삼랑창이 김해의 불암창을 대신했다는 점이다. 김해는 고려 후기에 이미 조창을 가지고 있었으나 조창이 다시 운영을 시작할 때 부활하지 못했다. 지금도 김해가 육지의 산물과 사람이 모이는데 부족함이 많은 곳으로 보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김해를 보는 시각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 흥미롭다.

가능하다. 조선 초에는 김해가 적당했으나 후기에는 적절치 않았다는 건 임진왜란을 전후로 한 시기에 교통의 요지로서의 위상이 완전히 상실되었을 것이라는 판단도 가능하다. 어떤 이유에서건 조선 후기 삼랑창은 불암창을 대체했고, 그만큼 교통의 요지로 인정을 받았다.
삼랑진에 조창이 들어선 배경을 설명할 때 간과할 수 없는 팩트가 하나 있다. ‘여지도서’다. 이 책은 1757년에서 1765년 사이에 각 지역에서 만든 읍지(邑誌)를 모아 묶은 책으로 1765년에 세상에 나왔다. 이전에 관에서 편찬한 지리지는 270여년 전의 신증동국여지승람이 마지막이었다. 읍지에는 각 지역의 상세한 지도와 함께 경제적 상황이 실렸고, 이를테면 경상도의 지리와 경제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했던 시기에 삼랑창 자리를 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240여년 뒤에 신공항 자리를 정하는 문제로 가장 정확한 지리적인 판단이 요구되었을 때 영조 임금 시대의 판단이 그대로 재현된 셈이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너무도 절묘하다.
삼랑진 지역은 철도가 개설된 이후에는 철도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삼랑진에는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유일한 철도 노선인 경전선이 연결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수탈의 거점이기도 했고, 이후 오랫동안 교통의 요지로 역할을 했다. 요컨대, 삼랑진의 위치는 영조 임금 때와 일제강점기, 그리고 일시적이긴 했으나 동남권신공항과 관련해 경상도 남부에서 사람과 물자가 모이기 가장 좋은 곳으로 낙점된 것이다.
다시 영조 임금대로 돌아가 보면, 당시 조창이 들어선 배경에는 수운의 발달이 있었다. 그렇다면 조창이 들어서기 전에도 밀양은 이미 물자와 사람의 발길이 번잡한 곳이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밀양부읍지’에 의하면, 1759년 밀양도호부의 호구수는 1만 49호, 5만 489명이었다. 1789년 서울인구가 18만9,153명, 대구 인구가 6만1,477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결코 적은 인구가 아니다. 사람과 물자, 정보와 문화가 교류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운심의 검무가 탄생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삼랑진이 다시 한번 거대한 교통 인프라를 품을 기회가 날아가버린 것은 아쉽지만 지역의 전통이 있는 만큼 언제고 경제와 교통, 문화의 요충지로 부활할 가능성은 농후하다. 밀양 사람들의 기개가 드높은 것은 어쩌면 그런 역사적 자신감 때문이 아닐까.


◼함께한 책
박지원, <광문자전> / 박성서, <100년 음악 박시춘>, 소동, 2012년
박주, <조선시대 읍지와 유교문화>, 국학자료원, 2016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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