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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자에서 사업 성공에 국전 초대 작가까지 됐죠”

  • 입력 2021.09.03 00:00
  • 수정 2021.09.07 09:54
  • 기자명 김광원기자, 박성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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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승형 월드로 대표


조승형(61) 월드로 대표는 재생화이버 업계에서 ‘붓을 든 사업가’로 통한다. 90년대 초반 서각을 시작해 뒤늦은 나이에 미대에 진학하는 등 예술에 심취해 국전 초대 작가에 어느덧 개인전을 10회 이상 연 예술가로 자리 잡았다. 사업에서도 예술 못잖은 성취를 이루었다. 재생화이바는 페트병을 비롯해 폴리에스터 제품을 재활용해 만든 옷감이나 부직포 등을 뜻한다. 조 대표는 지난 7월 대구경북의 재생화이버 관련 업체 30여 곳이 모여 결성한 (사)한국재생화이버협회의 초대회장을 맡았다. 그만큼 업계에서도 인정받는 사업가다. 사업이면 사업, 예술이면 예술, 두 분야 모두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성취를 이루어낸 보기 드문 사업가이자 예술가이다. 조 대표는 “본격적으로 예술을 하기 전에도 예술가적 기질이 다분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5년 만에 잘 다니던 회사를 박차고 나온 이유
조 대표의 고향은 전북 정읍. 혈혈단신으로 대구에 와 섬유공장에 취직을 했다. 본인 표현에 따르면 가난한 집안에 타향에서 기댈 곳도 없었던 까닭에 죽으라 일만 했다. 회사에 몸담은 지 5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을 즈음 그는 갑자기 사표를 던졌다.

“사장님은 ‘뭐 이런 녀석이 다 있지?’하는 표정으로 저를 쳐다봤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예술가적 열정이 저에게 파격적인 선택을 하게 한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무언가를 손으로 만드는 걸 좋아했는데 갑자기 기계를 제작해보고 싶은 열망이 용솟음치더군요. 기존 회사는 기계를 만드는 곳이 아니라 기계를 들여와 섬유를 뽑는 곳이었거든요.”

조 대표는 안정된 직장을 박차고 나와 섬유 기계를 제작하는 공장에 들어갔다. 이전 회사에서는 나름 관리자였으나 옮긴 직장에서는 다시 밑바닥이었다. 산업재해라는 개념도 없던 시절이라 아파도 참아가면서 일해야 하는 때가 많았다. ‘내가 왜 사표를 던졌을까’ 하는 생각이 가슴을 파고들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배우는 즐거움이 더 앞섰다. 여기에 내 사업을 하겠다는 의지 또한 힘든 줄도 모르고 일에 매진하게 한 원동력이었다.

1991년 창업했다. 섬유가공기계를 제작하고 수리하는 공장을 열었다. 믿는 구석이 있었다. 회사에 몸담고 있을 때 거래처 사장들이 “조 과장이 공장 시작하면 당연히 주문하지. 실력 최고잖아!” 하면서 추켜세우기 일쑤였는데, 막상 공장을 시작하자 대부분 전화를 피했다. 예상했던 것만큼 수주가 들어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정공법으로 돌파했다. 일거리가 들어오면 최선을 다해서 기계를 만들었다. 그렇게 조금씩 인지도를 쌓아올렸고, 그에 비례해 주문량도 조금씩 늘었다. 수출 기회도 찾아왔다. 1993년 파키스탄에 1억5,000만원 규모의 주문을 받았다.

몇 해 순탄하게 흘러간다 싶더니 90년대 말에 다시 고비가 찾아왔다. IMF 사태였다. 지금까지 겪은 난관과는 비교할 수 없는 파괴적인 난국이었다.

IMF “중국에서 영락없는 노숙자 됐죠”
“제가 거래하고 있던 업체뿐 아니라 주변 친구들 회사까지 전부 부도가 났습니다. 저 역시 문을 닫아야 할 상황이었죠.”

살길을 찾아 사방팔방 뛰어다니다가 기술신용기금에서 3억을 지원받았다. 말 그대로 무너진 하늘에서 어렵사리 찾아낸 구멍이었다. 3억을 종잣돈으로 한 무역회사와 함께 중국 수출을 진행했다. 당시 중국은 경제를 개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다. 중국 수출만이 살길이라고 여기고 중국 사업에 매진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문제가 터졌다.

“들어와야 할 돈이 안 들어오더군요. 그때 못 받은 돈이 7억원이었습니다. 그 돈이 없으면 회사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겠다 싶었죠.”

중국행 비행기에 홀로 몸을 실었다. 어떻게든 비벼볼 생각이었으나, 채무자들은 자기 집 문앞까지 찾아왔는데도 만나주지 않았다. 접촉이 되면 “제품 품질이 안 좋아서 돈을 못 주겠다”고 생트집을 잡았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중국 땅에서 조 대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찾아가고 조르고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4달이 흘렀다. 가지고 온 돈은 모두 써버렸다. 한국에서는 집이 경매에 넘어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타국에서 노숙자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안 좋은 생각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자식들이 눈에 밟히더군요. 실패한 사람, 못난 아버지로 기억에 남는 게 싫었습니다.”

다시 바닥이었다. 신용불량자로 은행 대출도 받을 수 없었다. 희망을 걸어볼 곳은 그간 거래처들과 쌓은 신뢰가 전부였다.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처럼 채권자를 한명 한명 만나러 다녔다.

“다행히 저와 거래했던 대표님들이 저를 생각하는 신용은 여전했습니다. 거래처에서 선수금이나 어음을 지원받았어요. 그동안 내가 허투루 살진 않았구나, 안도감이 들더군요.”

한 회사는 공장 안에 작은 방을 내주고 “여기서 재기해라”고 격려해줬다. 그렇게 주변의 도움으로 조금씩 빚을 덜어냈다. 마침내 2009년, 유럽과 미국에도 섬유 기계를 수출하기 시작했다. 기계를 끊임없이 업그레이드시킨 결과였다.

“우리 회사는 제품 개발에 상당한 투자를 합니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지만, 어느 순간 우리만의 저력으로 자리를 잡더군요. 그 노력들이 좋은 품질을 만들고 세계적인 수준에 오르게 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 ‘문자추상 – 동행1993’. 2019년에 발표한 작품.

 

▲ ‘천년의 기억’. 조승형 대표는 이 작품으로 2017년 대구시미술대상작을 수상했다.


“내 자신의 삶과 지구의 환경을 새롭게 하는 일 병행”
고비를 넘기는데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것이 예술 활동이었다. 퇴근 후 세상을 다 잊고 온전히 작품에만 몰입하는 시간이 그에게는 천국이다. 더군다나 나무를 깎고 파는 단순한 작업을 넘어 미술이라는 본격적인 창작에 들어서면서 그에게 예술활동은 단순히 마음의 위안을 주는 것을 넘어 ‘나’를 표현하고 다양한 체험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창구가 되었다. 사업과 예술의 성과 모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조승형의 흔적이자 성취다.

“고비 때마다 예술은 저에게 넘치는 영감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절망의 순간에 어두운 부분에만 빠져 있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것입니다. 일신우일신 마음과 관점을 새롭게 하고 용기를 얻는데는 예술 활동 만한 것이 없다고 확신합니다.”

조 대표는 “창작 활동에 제 삶을 새롭게 했다면 페트병을 재활용해서 플라스틱 섬유로 재활용하는 것은 지구의 환경을 새롭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서 “개인의 삶과 세상을 바꾸고 변화시키는 두 가지 일을 꾸준히 이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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