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한국일보 : 아름다운 사람들의 아름다운 이야기
사회
들려주고종 명령으로 일으킨 산남의진죽음만이 구국이었던 슬픈 역사이학무 걷기학교 ①영천 산남의진과 1907년(上)
대구한국일보  hankookdk@hankookilbo.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21.07.15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이학무 걷기학교>는 지난달 9일 경북 영천의 산남의진(山南義陣) 유적지를 돌아봤다. 현장에서 산남의진사(史)를 듣다 보면 전투에는 이기기 위한 전투와 승패를 떠나 싸울 수밖에 없는 전투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목숨 바친 싸움 자체가 구국의 전부인 경우도 있다는 말이다. 산남의진기념사업회 조충래 부회장이 안내와 설명을 도왔다.

   
 



1907년 영천 산남의진
호용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그의 나이 열다섯에 아버지를 여의고, 아버지를 여읜지 석 달 뒤 할아버지도 잃었다. 호용의 할아버지는 옥중에서 죽음을 직감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 호용을 위해 시 한 수를 남겼다.
집안은 망하고 몸은 이미 갇혔으니/비로소 이런 마음 가진 것이 후회된다/지금 가면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지만/한 가지 생각은 어린 손자가 있음이라//
뒷날의 일이지만 호용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부부처럼 나란히 무덤을 이루었다. 어린 호용이 한 일은 필시 아닐 것이었다. 이네들 무덤 앞에 서니 호용이 먼저 떠올랐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없어도 멀쩡하게 이어졌던 아이의 날들…. 어쩌면 이길 수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분연히 일어나 왜놈들이 쏜 신식 총에 속절없이 쓰러져갔을 그 숱한 주검들보다 더 괴롭고 더 아프고 더 한스러웠을지도 모른다. 그런 손자의 삶이 할아버지 눈에는 너무나도 선해 비가(悲歌)처럼 시구가 흘렀으리라.
“호용의 행적은 알고 있습니까.”

   
 



“모릅니다.”
“양세(兩世) 대장 후손은 있다면서요.”
“네. 정대영 씨라고 있습니다.”
“허면 그 분 통해 호용의 삶도 쫓아볼 수 있겠네요.”
“네. 그건 또 다른 과제입니다.”

   
 



그날 우리 일행을 이끈 사내는 전적지 입암(포항 죽전)에서 114년 전 일을 딴엔 소상히 들려주려 갖은 애를 썼다. 신록이 창취하고 한없이 평화롭기만 한 오늘의 현장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시간이 약이라지만 이 경우엔 막대한 장애였다. 강산이 족히 11번은 변했을 세월 앞에 의병(義兵)의 역사가 마냥 숭고하고 거룩한 것이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음이 동하지 않은 채 부러 뱉는 말은 시늉일 뿐이고, 그건 거짓부렁이자 말장난일 뿐이다. 그건 순국 의병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이다.
일제가 한반도를 집어먹은 뒷날, 서슬 속에 유림과 생존지사들이 뜻을 모아 지었다는 충효재(1934년 건립). 이곳이 품은 이야기는 이전 것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참전용사 499명의 위패 기운도 기운이려니와 충효재 벽면에 내걸린 1~4차 거병 조직도, 격전사적지, 참전지역명, 선전지역명 현판이 100여 년의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아리게 애석하게 다가왔다. 충효재 마당 한쪽엔 산남의진이 꾸려지게 된 사연을 알려주는 홀쭉한 바위가 서 있어 애잔함을 더했다.
그러니까 호용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 거였다.
1905년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주도로 왜놈과 을사늑약(외교권 박탈)이 체결되자 온 나라에 의분이 들끓었다. 고종은 측근 동엄 정환직을 은밀히 궁으로 들였다.
“경은 화천지수(和泉之水)를 아는가. 짐은 바라노라.”
고종은 이렇게 말하고, 동엄에게 ‘짐망(朕望)’ 두 글자 밀지를 내렸다.

   
 



화천은 옛날 제경공 이야기에 나온다. 제경공이 각 제후국의 군사에게 포위를 당해 거의 사로잡히게 될 지경에 이르렀다. 장군 봉추부가 급히 경공의 수레에 뛰어올라 자기 옷을 벗어 경공과 바꿔 입었다. 경공은 말고삐를 잡고 수레의 바른 편에 서게 했다. 이윽고 적장이 다가왔다. 이때 추부가 고삐를 잡은 자에게 소리를 높여 “내가 목이 마르니 급히 화천(和泉)의 물을 떠오라”고 했다. 고삐를 잡은 경공은 이 틈을 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고종은 동엄에게 봉추부가 되어 자신을 왜놈 소굴이 된 궁에서 구출해달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동엄은 눈물을 머금고 물러나 장남 용기를 불러 일렀다.
“아비는 한번 죽음으로써 황은(皇恩)에 보답하고자 하니 너는 집으로 돌아가라.”
용기는 서럽게 울며 말했다.
“임금이 신하를 부리고 아버지가 자식을 부리는 것은 의로움의 처음이요, 나라가 있은 후에 반드시 집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동엄은 용기의 뜻을 장하게 여기고 거병(擧兵)을 허하여 말했다.
“영남은 풍속이 충후하고 사족이 많이 거주하니 너는 영남으로 돌아가 사족을 모집하여 강릉으로 오게 하라.”
동엄이 고종에게서 ‘짐망’ 밀령을 받은 것은 1905년 동납월(음력 11월) 초닷새였고, 용기를 불러 거병을 명한 것은 그 닷새 뒤인 초열흘이었다.
이들이 거병을 꾀한 뜻은 크고도 높았다. 아들 용기가 의진을 이끌고 한양에 진출하면, 서울에 남아 퇴직관료와 군인을 모은 동엄이 합세, 고종이 머물던 경운궁(덕수궁)으로 가 왜놈을 물리치는 것이 1차 목표였다. 이것을 기회로 전국 도처에서 지사들이 일어나 왜놈을 이 땅에서 영원히 몰아내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용기는 고향 영천 검단으로 내려와 영남 일대를 돌며 의병을 모집해 산남의진을 꾸렸다. 그는 명망이 높아 대장에 추대됐다. 산남은 영남의 옛말이다.
우리 의병에게는 왜병에 비해 치명적 결함이 몇 가지 있었다. 군사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고, 무기도 변변치 못했으며 이렇다 할 보급선도 마련하지 못했다. 환경적 요인도 불리했다. 비와 바람 그리고 흰옷은 여러모로 전투를 어렵게 만들었다.
시간이 갈수록 서울 함락이란 거대한 목표는 요원해 보였다. 적의 계략에 속아 대장 용기가 경주에서 붙잡히고 설상가상으로 의병에 대한 민중의 원망이 솟구치자 군대는 해산했다. 다행히 목숨은 부지한 채 풀려난 용기는 고문 후유증에, 부끄러움에, 자책감에 몸져누웠다.
용기가 재거(再擧)에 나선 건 정미년 여름이었다. 군사, 무기, 군자금 모으는 일을 처음부터 다시 했다. 청하 신녕 청송 자양 등지에서 싸우면서 군사를 모집하고 군자금을 모았다. 신식무기를 든 정예병이었던 왜병을 상대로 이기기도 했지만 서울 상륙 작전은 진도가 더디기만 했다.
그 사이 왜병은 진용을 갖추어 의병 토벌작전에 돌입했다. 그해 9월 초하루 왜병과 입암에서 맞닥뜨렸다. 입암전투는 산남의진이 벌인 가장 치열한 전투로 기록돼 있다. 40여 명이 사망했다. 이때 용기도 적군의 총탄에 맞아 순국했다.
이즘 왜병은 전력을 다해 악독한 기세로 돌진했다. 방방곡곡에 왜병이 들끓어 자그마한 촌락에서도 진을 쳐 싸우지 않은 곳이 없었다. 왜병은 툭하면 민가에 불을 질렀다. 한 촌락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무고한 백성을 총칼로 잔인하게 죽였다. 골골마다 원통하게 죽은 새 무덤이 헤아리기에 눈물겨웠다.
동엄은 아들 용기를 이어 대장에 올랐다. 각지에 흩어져 있는 군사를 다시 불러 모아 대오를 새로이 정렬하니 처참한 정세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런 채로 동으로는 포항 흥해 청하 등지 각 읍을 공격하고, 다시 서쪽으로 신녕 구성 문소 등지를 함락하고, 북으로는 청송 진보 영덕 지대를 탄압했다. 가는 곳마다 소득이 있어 사기가 다시 떨쳐 일어나 백성들도 환호했다.
청하에서 북상길이 막히자 동엄은 의진을 관동으로 옮기기로 했다. 각자 상인 광부 농부로 변장한 뒤 소규모로 북상토록 명령했다. 동엄은 이 명을 끝으로 왜병 수색에 발각, 체포됐다. 왜병 중대장이 귀순을 권했지만 동엄은 거부했다.
동엄은 1907년 11월 13일 ‘탈출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총살형에 처해졌다.
1934년 영천 유림과 지사는 정환직·정용기 부자의 살신성인 정신을 기려 충효재를 건립했다. 이때 동명 검단리를 충효동으로 바꾸었다.
1946년 해방 6개월 만에 전국 유림 수백 명이 모여 포항 죽장면 입암시장에서 입암전투 순국선열 추모제를 거행했다.
1963년 산남의진기념사업회가 꾸려졌다. 맥이 끊어졌다가 2013년 산남의진 4차 결집지였던 천년고찰 거동사가 국가현충시설로 지정되면서 재결성됐다.

산남의진 투쟁사 뒤엔 인간사가 면면히 흐르네…

① 산남의진의 의의… 어떤 역사는 재미있어 머릿속에 쉽게 각인되지만 많은 경
우는 반복학습을 통해 익숙해진다. 우리는 대개 이 익숙한 역사를 사실(事實·史實)
로 믿는다. 그리고 그 신앙 같은 역사 일부를 머리와 가슴에 인 채 사회로 나간다. 사
회로 나가 경험이 축척되면 공인된 역사 말고도 수습되지 못한 지역사가 무수하다는
걸 알게 된다.
그 지역사는 대체로 명료하지 않고 뭔가 허술하고 흐릿한 채로 몇몇 지역인사에 의
해 더딘 기억운동 중이란 것도 알게 된다. 이미 머리는 굳었고 반복학습의 장은 과거
사가 돼 특정 지역사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이때 좋은 해법은 ‘역사 대입법’을 활용하는 것이다. 역사란 우리네 삶을 기록한 연
대기란 점에서 공인된 역사에다 잊힌 지역사를 연대순으로 놓고 살펴보는 것이다. 그
러면 전혀 관계없어 보이던 사실들 사이 상관관계가 드러나고 나름의 관점을 확보
할 수 있다.
산남의진사(史)는 대중적이지 않다는 의미에서 구한말 의병사 중 모퉁이 역사에 해
당한다. 하지만 같은 해(1907년) 전개됐던 대구의 국채보상운동과 서울의 천도교 개
화교육을 함께 살펴보면 산남의진의 위상은 자못 달라진다.
1905년 을사늑약부터 1910년 경술국치까지 대한제국에선 목숨 바쳐 싸우거나, 나
라 빚을 갚거나, 서구식 신식교육 사업에 앞장서는 일을 일러 구국(救國)이라 했다.
산남의진과 국채보상운동 그리고 천도교의 개화교육은 그 가치의 경중을 따지기 어
렵다. 기꺼이 목숨을 바쳐 구국에 뛰어들었다는 점에서 산남의진 활동은 잘 보듬어
야 할 역사다.
산남의진은 1,000여 명 규모로 24개 고을에 79명의 지대장을 임명한 대진영이었
다. 산남의진은 1908년 허위, 이강년, 여중룡 선생 등이 주도한 13도 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 단초였고, 잔여의병들은 뒷날 국내에서, 만주에서 독립군과 합류해 조국 광
복을 위해 투쟁을 이어갔다. 일본군은 동엄 정환직 선생을 일러 “폭도 중 최고 강경
백발노인”이라고 했다. 우리는 의병의 결기 따라 어찌 회천(回天)한 조국인지 잘 아
로새겨야 한다.
② 사과밭 의사무덤… 산남의진사가 투쟁사이기만 할까. 투쟁사에만 갇히면 그 이
면에 면면히 흐르는 인간사를 볼 수 없다. 산남의진 유적지 중엔 한눈에 봐도 사연 있
는 무덤이겠거니 하는 무덤 하나가 있다. 그 무덤은 구태여 찾겠다는 마음과 안내자
가 없다면 알아보기 힘든 곳에 자리했다. 사과밭 입새에서 몇 고랑을 지나 어렴풋이
보이는 안쪽 고랑 끝 무성한 풀숲을 향해 쭉 걸어가야 한다. 사과밭 물탱크 아래 잡초
가 웃자라 무덤인지 가리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잡초를 이리저리 발로 밟아 정리하
자 묘비가 드러났다. 이 무덤의 주인공은 전화준. 묘비에는 전 의사가 산남의진에 참
여했고 자식은 없다고 돼 있다. 생몰연대는 알 수 없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동중에서 전 의사의 제(祭)를 매년 지낸다고 한다. 홀몸인 전
의사가 생전 가꾸던 땅을 묘답으로 동중에 내주었고, 동중에서 그 보답으로 지금까
지 제사를 모신다는 것이다. 묘답은 묘에서 지내는 제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경작
하던 논을 말한다. 예로부터 이웃사촌 정이 먼 친척 정보다 낫다고 했는데 참말인 듯
했다. 사실 의병사는 전투 면에서는 몰패사에 가까웠다. 그 이면에 애잔한 사연이 구
전으로 내려온다.
정용기 대장 등 40여 명의 의사가 입암전투에서 순국하자 생존 의사들이 패전한 곳
에서 흰옷을 바꿔 입는 대례로 충혼을 추도했다고 한다.(흰옷 입고 눈물을 훔치는 수
백 명의 장졸 모습을 떠올려 보라!) 입암전투 후 14~15세 소년 이석선(李錫善)·정한준(鄭漢駿)이 진에 가담해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자 정환직 대장이 돌려보내라고
명했다. 세상 사람이 모두 이들을 기특하게 여겼다고 한다.(의진 사정은 지극히 어려
웠어도 장졸들은 염치라는 걸 알았다!) 산남의진에는 군용물과 화약을 비밀리에 전
달하는 숨은 후원자가 있었다. 부산 방면에서 포백상을 하는 김석사와 대구 철도공
장 인부로 일하던 유석사였다.(‘석사’는 벼슬이 없는 선비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난
세에 선비가 따로 있으랴!)
③ 3인의 대장처럼… 산남의진 활동기간은 1906년 3월부터 1909년 9월까지였
다. 총 4번에 걸쳐 거병한 산남의진은 정환직 선생이 총수로 그의 아들 정용기 선생
이 1대 대장이었다. 정용기 대장이 순국하자 정환직 총수가 2대 대장에 추대됐다. 정
환직 대장이 순국하자 최세윤 선생이 3대 대장에 올랐다. 산남의진에서 세 대장은 삼
각형의 꼭짓점 같다.
묘하게도 산남의진기념사업회에도 세 명이 중추를 이룬다. 혜신 스님(전 거동사 주
지)과 조충래 전원생활체험학교 교장, 그리고 조정숙 보현자연수련원 원장이다. 혜신
스님이 사업회 회장을, 조충래 교장이 부회장을, 조정숙 원장이 고문을 각각 맡았다.
혜신 스님은 2013년 산남의진 4차 거병지였던 거동사가 국가현충시설로 지정될 때
주지였다. 혜신 스님은 산남의진 사연을 알은 뒤부터 매년 의병의 날(6월 1일)을 앞두
고 추모제를 지냈다. 2013~2014년 혜신 스님은 사재 3,000만원 들여 주변 땅을 매
입, 정환직·정용기 양세 대장 묘지를 번듯하게 정비했다.
조충래 교장은 산남의진유사(1970년), 산남창의지(1946년) 등 역사서 번역을 총괄
하고 산남의진사를 민간에 알리는 일을 맡고 있다. 올 연말 ‘산남창의지’ 번역본을 대
중에 공개할 예정이다.
조정숙 원장은 추모제를 비롯해 산남의진 백일장 등 선양사업이 있을 때마다 식사
를 제공한다. 제1회 산남의진 추모제 때는 500인 분의 식사를 도맡아 했다. 작년에
이어 올해는 코로나19로 추모제를 열지 못했지만 근래에는 200인 분의 식사를 마련
한다고 한다.
정환직, 정용기, 최세윤 대장이 대일 투쟁을 했다면 혜신 스님, 조충래 교장, 조정숙
원장은 대민 투쟁 중이다. 대중을 상대로 산남의진 기억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산남의진 백일장 공모전은 그 선봉에 있다.
④ 산남의진 백일장… 산남의진기념사업회가 ‘2021 산남의진 백일장’을 공모한다.
대상은 전국 초·중·고등학생 및 일반인. 원고는 6월 1일부터 8월 20일까지 접수받는
다. 주제는 산남의진 역사와 활동 내용이다. 장르는 시와 산문. 원고 분량은 200자 원
고지 기준으로 초등부는 6매 내외, 중·고등부는 10매 내외, 일반부는 20매 내외다.
유의할 사항은- 작품 끝 부분에 이름, 학교, 학년, 전화번호를 반드시 적어야 한다.
컴퓨터로 작성할 경우 본문 글자 크기를 14포인트 이상으로 하여 제출해야 한다. 당
선작의 저작권은 (사)산남의진기념사업회에 귀속되며, 입상자 수나 시상 품격은 응
모자 수와 작품 수준에 따라 변경될 수도 있다. 순수 본인 작품이어야 하며, 응모 작
품은 반환하지 않는다.
참가비는 없으며, (사)산남의진기념사업회(경북 영천시 자양면 별빛로 1051)로 우
편접수만 가능하다. 시상식은 10월 16일 충효재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장원에 선정되면 학생은 20만원의 상금과 함께 경상북도교육감상이, 일반인에게
는 50만원의 상금이 주어진다. 수상자 전원에게는 기념품과 수상작품집이 제공된다.
문의처) 010‐3815‐3568, e‐mail: ccrae38@hanmail.net
※이 취재는 전국에서 모인 ‘농촌에서 한 달 살아보기 프로그램’ 참여 중인 예비 귀촌인들
이 함께 했습니다.

   
 

 

대구한국일보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인기기사
1
2021년 송년 신유&박서진 효콘서트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신문사소개 | 구독안내 | 광고안내 | 독자정보서비스 | 기사구매문의 | 사업제휴안내 |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 | 이용약관 | 정정보도신청 | 채용안내 | 고충처리
대구시 북구 중앙대로106길 2, 3F, 4F | ☎ : 053-755-5881 |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대구,아00174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광원
등록일자: 2015년 4월 16일 | 발행인: 유명상 | 편집인: 김광원
인터넷 대구한국일보의 모든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Copyright © 2012 대구한국일보 : 아름다운 사람들의 아름다운 이야기. All rights reserved. mail to hankookdk@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