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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을 삶의 목표로 삼아도 좋겠다

이진숙 ‘클럽리의 문화마당’

  • 입력 2021.07.17 00:00
  • 기자명 대구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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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숙 전 ‘클럽리’ 대표


나이가 드니 좀 더 친절하고 싶어진다. ‘어떻게 나이들 것인가?’ 같은 어렵고 거창한 고민을 할 게 아니라, 무슨 일이든 친절하게 하는 거다. 할 수 있는 작은 친절로부터 차츰차츰 큰 친절로 나아가는 거다. 친절의 수준을 높이면 삶의 수준도 높아지면서 모든 게 달라질 거다. 좋은 삶이 될 것 같다. 

곳곳에서 영국인의 친절을 봤다. 버스 기사가 버스를 정류장 도로에 바짝 붙여 세운다. 인도의 높이와 버스 문의 높이가 같아서 그렇게 하면 도로와 문 사이에 틈이 없다. 승객이 타고 내리면서 다칠 염려가 없어지는 거다. 승객에게 버스표를 팔 때는 시동을 완전히 끈다. 승객이 물어보는 말에 일일이 대답하고, 서두르지 않고 거스름돈을 내어주는 거다.

운전할 때도 친절하다. 좀처럼 경적을 울리지 않으며 양보를 잘한다. 좁은 골목에서 마주치면 라이트를 깜빡거리는데, 한국에서는 ‘내가 먼저 갈 테니 기다리라’는 신호가 영국에서는 ‘내가 기다릴 테니 먼저 가라’인 것이 흥미롭다. 다른 차가 내 차 앞으로 끼어들 때도 잘 비켜준다. 뒤차를 막고 서서 끼어들려는 차에게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을 보내기도 한다. 공항에 가면서 택시를 탄 적 있다. 차가 막혀 걱정했는데 기사도 그랬나보다. “죄송하지만, 지금부터 약간의 무례를 범하겠습니다”라는 말이 뭔 말인가 했다. 아니, 끼어드는데도 양해를 구하다니! 

런던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비가 부슬부슬 오는 저녁이라 춥고 축축해서 얼른 집에 가고 싶었다. 타고 있는 버스가 정류장마다 들려서 승객을 태우는 중이었는데, “먼저 타시지요”라는 목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봤다. 자기 차례가 된 남자가 하나밖에 남지 않은 자리를 여인에게 내어준다. 순간 내 머릿속에는 ‘신사’가 떠올랐다. 

영국 친구가 모르는 사람의 전화를 받았다. 상대가 꽤 오랫동안 뭔가를 권하는데도 친구는 내내 친절하다. “아주 솔직하게 말해서”라며 사양하더니, “다시 생각해봐도” 아니라고 하고, “나중에도 내 마음은 달라지지 않는다”면서 거절한다. 통화가 끝낼 때까지 흥분하지도 서두르지도 않고 솔직하고 정중하기까지 하다. 그럴 때 나는 완곡하게 거절하다가도 “지금 바쁘다” “손님과 이야기 중이다”라며 두리뭉실하게 둘러대고, 짜증이 나면 그냥 끊어버리기도 하는데. 

그들은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친절했다. 바쁘다면서 소홀하게 대하지 않았으며, 자신보다 상대를 생각했다. 궂은 날씨에 먼 거리를 가야하는데도 불구하고 자리를 양보했다. 짜증이 날 것 같은 경우에도 흐트러짐 없이 공손했다. 곳곳에서 ‘신사’와 ‘숙녀’를 보는 듯했다.

가족과 친구들에게는 나도 그런 편이다. 기다려줄 수 있고 이해해줄 수도 있다. 수고를 마다하지 않을 수도 있고, 화나 짜증을 내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별로고 글쎄다. 그러면서도 여태 내가 친절한 사람이라고 믿으며 살아온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사람이 하는 일엔 항상 그 사람의 성격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글도 그렇고, 운전도 그렇고, 요리도 그렇고.(황현산,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라는 글을 읽는데 속이 뜨끔했다. 

조지 손더스는 <친절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더 친절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아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쉬운 것 같아도 친절하게 행동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면서, 서두르라고, 속도를 내라고, 지금 당장 시작하라고 말한다. 친절을 너무 아끼면서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말을 믿고 친절을 삶의 목표로 삼아보면 어떨까. 내가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조금만 더 친절하도록 노력하면 어떨까. 누구에게든 내가 먼저 친절하게 대하면 어떨까.

친절은 내가 커지는 일이고 내 삶이 커지는 일이다. 친절은 ‘누군가 내게 해주면 좋을 것 같은 일’을 해주는 일이다. 이어달리기가 바통으로 이어지듯, 친절이 줄줄이 이어지면 좋겠다. 신기한 마법처럼, 친절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일이 일어나면 좋겠다. 나이가 들면 무언가 달라지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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