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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비문‘전준한 콘텐츠’ 세상에 알린 주역 (우리나라 민간 최초의 협동조합 설립자) 상주 지역사랑 남다른 이 분이죠

이학무 걷기학교 ②김상호 상주역사공간연구소 대표

  • 입력 2021.06.07 00:00
  • 수정 2021.06.07 17:15
  • 기자명 이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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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 상주역사공간연구소 대표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협동조합동인 함창협동조합 발상지(상주시 함창읍 오사리 215번지)를 찾아 지적도를 보여주고 있다.

 

2017년 6월 29일 협동조합의 날(매년 7월 첫째 토요일)을 일주일 앞두고 상주 함창읍행정복지센터 2층 회의실에서 ‘협동조합 발상지 재조명 및 활성화 포럼’이 개최됐다. 부제는 ‘함창협동조합 설립 90주년 기념’. 경상북도 내 협동조합 담당자, 협동조합, 사회적경제인 등 150여 명이 참석했다.
비록 포럼 규모는 작았지만 일본노동자협동조합인 워커스 코프 연합회의 나카노 오사무 국제부 주임과 농협중앙회 도농협동연수원 권갑하 원장 등이 발표자로 나서 관심을 모았다.
특히 이 포럼은 ‘상주 함창이 우리나라 협동조합의 발상지라는 사실’과 ‘함창협동조합이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협동조합이라는 사실’을 조합 설립 90년 만에 처음으로 공론화하는 자리여서 이목이 쏠렸다.
이날 회의실 뒤편에 서서 3시간 동안 경청한 이가 있었다. 김상호 상주역사공간연구소 대표였다. 그날 그가 이 자리에 참석해 끝까지 자리를 지킨 까닭은 자신이 상주시청 공무원인 것은 둘째 치고 포럼책자 부록에 게재된 ‘상주 협동 및 농업조합의 설립과 변천’이란 원고 작성자였기 때문이다. 이학무 걷기학교 ②김상호 상주역사공간연구소 대표
김 대표는 상주시청에서 43년간 재직하다 지난해 퇴직했는데, 공직 중에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발히 활동하며 향토사에 천착했다. 3년 전엔 20년 준비 끝에 ‘경북상주지역의 바위글과 그림’을 발간했고, 지난해에는 상주역사공간연구소를 열고 ‘상주읍성’을 발간했다.
이렇듯 상주 사랑이 남달랐기로 김 대표는 포럼 때도 발표자와 토론자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웠던 것이다. 그는 원고에서 상주 중심의 협동조합과 농협조합을 다뤘지만, 권 원장은 ‘한국 협동조합운동의 기원과 함창협동조합의 위상’이란 발표문을 준비해 합을 이뤘다.
게다가 권 원장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성격의 협동조합운동은 민간협동조합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그 중 협동조합운동사 소속 전준한 씨가 경북 상주 함창에 창립한 함창협동조합이 근대협동조합의 효시가 되는 협동조합이다”고 못박음로써 김 대표의 글에도 힘이 실렸다.
이 포럼을 주최한 경북도는 이날 성과를 갖고 사회적경제 중간지원기관 지역과소셜비즈, 대구한국일보 부설 한국콘텐츠연구원, 상주시와 힘을 합쳐 3년 전 ‘전준한 사회적경제 대상’을 만들고, 올 1월 ‘협동조합 역사문화관’을 개관했다.
경북도는 지난해 대한민국 최초의 민간협동조합을 조명하고 ‘전준한 사회적경제 대상’을 제정·시행한 공으로 ‘지자체 사회적경제 정책 평가’에서 대상의 영예를 안았다. 김 대표가 숨은 공신이다.
아래 이야기는 한국콘텐츠연구원에서 ‘전준한 사회적경제 대상’ 행사를 위해 2017년에 지은 것으로 애당초 그의 원고를 기초로 삼았다. ‘협동조합 역사문화관’이 적재적소에 살려 쓰지 못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 협동조합 역사문화관 전경.


▲전준한과 상주 함창협동조합
‘고등경찰요사(1934)’라는 책이 있다.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볼 수 있는 책이지만, 발행 당시만 하더라도 조선총독부 경상북도경찰부(現 경북지방경찰청 격) 고등계 형사만 볼 수 있는 대외 극비문서였다.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계 형사, 극비문‘서 같은 단어에서 짐작했겠지만 이 책은 일제 강점기 때 비밀리에 보급된 것이었다. 왜? 조선, 특히 경북지역의 독립운동 관련 인물, 동향, 기본사항을 낱낱이 파악해 무자비하게 탄압할 목적이었다.
고등계 형사들이 그 선두에 섰다. 그들의 요시찰 인물 중에 상주 함창 출신의 전준한이란 청년이 있었다. 전준한, 그는 스물여섯 살에 동경대학을 중퇴하고, 고향 함창으로 돌아와 이 땅에 최초의 민간협동조합을 주도한 협동조합 설계자다. 그는 중간이윤 철폐, 고리대 구축(驅逐), 경제적 단결, 자주적 훈련을 모토로 이상적인 농촌사회를 꿈꿨다. 그것이 애국하는 일이요, 독립운동의 다른 길이라고 생각했다.
‘고등경찰요사’는 전준한의 행적을 이렇게 적고 있다.
“1927년 1월 상주군 함창에서 전준한이 주동이 되어 생산소비의 공동관리를 표방하는 함창협동조합을 설립한 것이 (협동조합의) 시초이다. 선전효과가 있어 그해 4월 3일에는 중모협동조합, 10일에는 상주협동조합이 계속 설립되고, 다시 5월 6일에는 청리협동조합이, 7월에는 안동군의 풍산협동조합, 8월 13일에는 예안협동조합 등이 계속 생겨났다. 그해 11월 ‘협동조합운동과 실제’라는 제목의 팸플릿을 발행했다.
(위 책 pp139~141)”
이에 대해 ‘함창협동조합보고서’는 다른 이야기를 알려준다. 보고서에 따르면 전준한은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 함창군 일대를 순회 선전하는 동시에 각 동(洞) 유력자 30여 명의 발기인을 모집한 후 약 1개월간 준비했다. 마침내 그해 1월 14일 발기인 총회를 개최했는데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발기인은 전원 불참하고, 노인 7~8명만이 출석했을 뿐이다. 전준한이 발기인 몇몇을 직접 찾아가 ‘왜 마음이 바뀌었냐’고 묻자,
‘가난한 자들은 무능한데 누가 그들을 믿고 거액을 투자하겠냐’는 매몰찬 답변이 돌아왔다. 하지만 전준한은 농민 8명과 함께 발기인 총회를 치렀다.
이때 전준한이 포기하지 않은 것은 신심(信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일본 유학 당시 뜻을 같이한 유학생들과 세계협동조합 모델들을 탐구했던 덕분이었다. 이를 통해 영국을 제외한 독일, 벨기에, 프랑스, 러시아, 스위스, 덴마크, 이탈리아, 아일랜드 모두가 국토가 뜯기고 헐린 극난(極難)한 전시경제 속에서 어렵게 협동조합운동을 시작했고, 끝내 성공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 가장 모범적인 영국의 협동조합 역시 처음엔 28명의 조합원과 조그마한 구멍가게에서 몇 푼어치 일용품을 판매하면서 출발했다는 것도 알았다.
전준한의 협동조합은 발기인 총회 이튿날, 조합원 전원이 출동해 진력을 다해 조합원을 모집했다. 수일 만에 60여 명을 모집했다. 석유 한 두레박, 성냥 약간, 소다 한 통을 사서 시작한 영업은 기대 이상이었다. 함창시장 한 구석에 3원짜리 월세 사무실도 한 달도 안 돼 마련했다. 그해 5월에는 여자야학을 열어 경비 일체를 부담, 40여 명에게 교육의 장도 마련해 줬다. 이쯤 되니 ‘함창협동조합을 모방한 협동조합이 각지에서 봉기’했다. 1930년대 들어 그 수만 100여 개에 이르렀다.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던 일제가 1933년 해산명령을 내리면서 협동조합 조직은 와해수준으로 접어들었지만, 전준한은 때를 기다리며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해방 후, 한국전쟁 중엔 협동조합법을 마련하기도 했다.
전준한은 협동조합의 의의를 다음 3가지에 찾았다.
-협동조합운동은 자본주의 제도의 결함에서 산출된 각종 사회운동의 하나의 형태이다.
-경제적 약자가 상호부조의 협력에 의하여 그들의 경제적 향상을 기도하며, 자본주의의 결함을 배제하려는 사회 이상을 가지고 발생한 경제적 조직체이다.
-협동조합은 그 내용에 있어서 여러 가지의 형태를 포장하고 있으나 즉 소비, 신용, 생산, 판매, 이용 등의 조합이 이것이다.
전준한은 동생 진한(*)의 이론서를 바탕으로 “전인구의 8할을 점유한 대다수의 농민생활은 나날이 파멸의 심연에 빠져 있다”고 진단하고, 이를 타개할 방편으로 협동조합운동을 내세웠다.(*)전준한의 동생 전진한은 우리나라 초대 사회부장관을 지낸 인물이다. 그의 회고록 ‘이렇게 싸웠다’에는 정신적 지주였던 형 준한을 그리는 애절한 마음이 여실히 녹아 있고, 일본유학 시절 배운 선진 협동조합을 근거해 쓴 ‘협동조합운동의 실제(1927)’ 등도 함께 수록돼 있다.
“조선사회에는 고대의 사회제도라든지 각종 계라든지 현대조합에 흡사한 경제조직이 고대부터 전래하였다. 따라서 조선사회에 협동조합의 실현성이 가장 풍부한 당시에 모든 객관적 정세로 보아 이 협동조합운동이 대중으로 하여금 경제적으로 단결하며 자주적으로 훈련해 분산적 생산에서 조직적 집단적 생활로 유도하기 최적한 방편일 것이다.”(진진한, ‘이렇게 싸웠다’, p30)
전준한의 협동조합운동에서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은 조직 운영에 있다.
1. 출자는 일인일구(一人一口)주의(유산자의 전횡방지)
2. 배당은 이용액에 따라(잉여금배분의 공평)
3. 매매는 시가현금주의(소자본의 운전민활)
4. 빈인은 출자불입 유예(사업의 대중화)
이 원칙은 현대의 협동조합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다. 어느 것 하나 변변치 못했던 상황에서도 성공적으로 협동조합을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협동조합 정신을 준수하려는 각오가 남달랐기 때문으로 보인다.
‘협동조합운동의 실제’ 5항에는 ‘협동조합실지경영에 관한 주의’가 있고, 6항에는
‘협동조합의 지도자에 대한 주의’가 있다. 성실할 것, 절약할 것, 지도할 것, 조합원 간 원만한 관계 유지할 것, 욕심내지 말 것, 출자금 관리를 철저히 할 것, 선전할 것, 무자각한 유산자를 조심할 것, 몸소 실천할 것, 사업을 위해 논쟁을 초월할 것, 동지를 신임하는 동시에 언제든 분란을 각오할 것. 이들 항목은 모두 전준한이 준수해야 할 것들이었다(심지훈, ‘퍼스트 펭귄 전준한 이야기’, 한국콘텐츠연구원, 2017)

▲ 상주시 함창면 오사리 215번지 함창협동조합 발상지 전경.
▲ 오사리 215번지 지적도. 붉은색으로 표기한 것이 옛 집모양이고, 함창협동조합은 본채 작은방에서 시작됐다.
▲ 함창시장 내 함창협동조합 이전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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