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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언제나 유토피아를 꿈꾸지만 일도윤회 누에에는 비할 바 못 되네…(그저 주고 또 주고 다 주는 생명)

이학무 걷기학교 ①상주 함창

  • 입력 2021.06.07 00:00
  • 수정 2021.06.07 17:07
  • 기자명 이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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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십승지 중 한곳인 상주시 화북면 우복동 앞에 새겨진 洞天 바위(왼쪽 사진)와 고녕가야태조왕릉(위 사진).

<이학무 걷기학교>가 상주 함창으로 갔다. 함창은 뜨내기 여행자 눈에는 그저 고즈넉한 시골마을일 뿐이겠지만, 고장 내력을 살피고 보면 진취적이고 역동적인 데다 심지어 혁명DNA까지 품어 녹록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최근 이 고장엔 연거푸 상징적인 두 공간이 문을 열었다. 하나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협동조합인 함창협동조합<관련기사 36, 37면>을 기억하는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함창명주’란 명성에 걸맞게 우리나라 한복 한류를 선도할 공간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길을 잡고 보면 뜻하지 않는 여정이 보이지 않는 어떤 손에 의해 마련돼 있다. 이를 우리는 우연이라 하고 인연이라고도 한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함창이 품은 갖은 유전자를 알지 못하면 돋을새김은 언감생심일 터다. 이는 ‘알아야 면장을 한다’는 구수한 우리 속담과 맥을 같이 한다.
① 고녕가야태조왕릉
… “보시다시피 왕릉은 이렇게 실존하는데 우리 정부와 학계는 뚜렷한 근거 없이 이 무덤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상주역사공간연구소 김상호 대표의 말이다. 사방 담장으로 둘러싸인 우람한 무덤 입새 표지판에서 우선 ‘고녕가야’라는 단어가 어딘가 낯익고도 낯설었다. 낯익은 것은 부족국가 육가야의 맹주였던 대가야의 고분이 산재한 경북 고령(高靈) 때문이고, 낯선 것은 ‘고녕(古寧)’이 ‘가야(伽耶)’와 짝을 이뤘기 때문이다. 왕릉 주변 두 안내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능은 서기 42년 낙동강을 중심으로 일어난 6가야 중 하나로 함창, 문경, 가은 지방을 영역으로 하는 고령가야의 태조왕릉이다. 조선 선조 25년(1592) 당시 경상도 관찰사 김수와 함창현감 이국필 등이 이 무덤 앞에 묻혀 있던 묘비를 발견하여 고령가야왕릉임을 확인했다. 함창은 본래 ‘고령가야국’이었는데 신라가 빼앗아 ‘고동람군’으로 하였다가 경덕왕 때 ‘고녕’으로, 고려 때 함녕, 함창으로 고쳤다는 기록이 전한다.」 표지판과 안내문의 표기가 달라 “고령가야인지 고녕가야인지” 김 대표에게 묻자 “경북 고령과 혼란의 여지가 있어 근래에 원음대로 ‘고녕가야’라고 쓰기 시작했다”고 귀띔했다. 고녕가야태조왕릉은 동쪽에는 태봉산, 서쪽에는 대가산, 남쪽에는 오봉산, 북쪽에는 작약산 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김 대표는 배계절(자손들이 절할 수 있도록 평평하게 만들어 놓은 곳)에 서서 지형을 들어 함창 일대가 삼한시대 육가야가 유력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부족국가가 서려면 기본적으로 풍부한 물과 기름진 땅 그리고 우직한 산이 필요했습니다. 보시는 것처럼 태봉산 대가산 오봉산이 우뚝 솟아 있고, 왕릉 앞쪽 오봉산 아래는 이안천이 흐르는데 이안천은 문경서 흘러드는 영강과 합류하지요. 태봉산 아래는 드넓은 들이 있고요.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에도 오가야 중 하나로 고녕이 기록돼 있습니다.(*)” 김 대표 얘기에 도로 처음으로 돌아갔다. “정부와 학계에선 왜 이 무덤을 인정하지 않는 겁니까.” “역사학계 거두 이병도 선생이 관찰사 김수와 함창현감 이국필이 발견했다는 묘비가 없다는 이유로 육가야로 보기에 어렵다는 견해를 냈기 때문이랍니다. 그 이후 정부와 역사학계는 여기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어요. 또 한편으로는 항공지도를 보면 봉우리 굴곡이 마치 용이 웅크리고 앉은 형태인데, 이를 두고 호사가들은 굴곡이 심해 뱀이 앉은 형태라 왕릉이라고 볼 수 없다고 폄훼하기도 합니다.” 김 대표에 따르면 2019년 상주시에서 오봉산 일대 고분을 전수조사한 결과 모두 618기(직경 20m)로 파악됐다. 상주시는 올해 10억 원을 들여 고녕가야국 실체를 규명하기 위한 발굴조사에 착수했다. 홀연 명구 하나가 떠올랐다.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 가지만, 그들이 바라는 꼭 그대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한 환경 속에서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주어진, 물려받은 환경 속에서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칼 마르크스, ‘프랑스 혁명사 3부작’ 중)
(*)『삼국유사』 「기이 제1」 편 ‘오가야’ 조 본조사략(本朝史略)에 고녕가야(古寧伽耶)의
“고녕(古寧)은 지금의 가리현”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가리현은 지금의 경북 성주를 가리킨다고
풀어놓아 함창과는 합치하지는 않는다.(‘삼국유사’, 일문서적, 2012)
② 한국한복진흥원
… ‘한국 근대의 역사민족지-경북 상주의 식민지 경험’을 쓴 이타가키 류타(도시샤
대학) 교수는 하필 상주를 주목한 데 대해 사족 및 이족에 관한 자료가 풍부하다는 것
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 이후 존재감이 약해서 연구가 별로 많지 않다는 것을 주
된 이유로 들었다. 이타가키 교수의 생각과 앞의 마르크스 생각을 되짚어보면, 상주
함창은 ‘근대 이후 존재감이 약해졌어도 주어지고 물려받은 환경 속에서 역사를 어기
차게 만들어가는 곳’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실제 그러한가 보려면 고녕가야태조왕릉과
지척인 상주함창명주테마파크(약 215,000㎡)로 가 그 역사쓰기의 어기참을 가늠해
보면 된다. 함창은 고대에는 부족국가가 섰던 곳이고, 근대로 오면 잠사업과 명주업
이 흥했던 곳이다. 인간 습성상 현재를 기준으로 비교적 가까운 과거를 더욱 또렷하
게 기억하는데 힘쓴다는 점을 상기하면, 상주가 함창명주를 유별나게 대물림하려는
것은 상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족히 100년이 흘렀어도 함창엔 과거 잠사·
비단의 영광들이 훈장처럼 박혀 있다. 79,338㎡에 이르는 뽕나무밭이 있고, 누에를
키우고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내는 잠사곤충사업장이 있다. 또 명주실에서 비단을
짜는 직조회사 장수직물이 있고, 함창명주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까지 일별해 볼
수 있는 명주박물관이 있다. 그리고 지난 4월 마침내 상주함창명주테마파크의 화룡
점정이라 할 수 있는 한국한복진흥원(한복원)이 문을 열었다. 한복원은 191억 6,000
만 원을 들여 연면적 8,198㎡에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만들어졌다. 한복 특유의
곡선미를 살려 전통 여인의 모습을 형상화했다는 한복원의 외형은 인근 가파른 언덕
위에 초연히 선 정자에 올라야 그 진면모를 잘 느낄 수 있다. 내부는 한복전시 홍보관, 융·복합 산업관, 한복전수학교 등으로 구성됐다. 이로써 누에부터 비단옷까지 전 과
정을 보고 듣고 체험하는 것은 물론 콘텐츠 플랫폼이 있는 국내 유일 명주문화산업시
설이 진용을 갖추었다. 앞으로 한복원은 전 세계 한복 한류를 목표로 동아시아 한복
네트워크 구축, 한복문화콘텐츠 개발, 도내 전통섬유산업(함창 명주, 안동 안동포, 풍
기 인견) 협업을 선도하게 된다.

▲ 두곡리 뽕나무(천연기념물 제559호).

 

 

 

③ 천연기념물 제559호
… 함창 명주테마파크를 둘러봤다면 부근의 ‘두곡리 뽕나무(상주 은척면)’를 지나칠 수
없다. 은척면은 1914년 당시 전체 769호 농가 중 750호가 양잠에 종사할 만큼 양잠업이
성행했던 곳이다. 이를 웅변하듯 두곡리에는 수령 350년 된 우람한 뽕나무가 한 그루 있
다. 워낙 상징적이라 경상북도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됐다가 지난해 2월 국가지정문화재 천
연기념물 제559호로 승격됐다. 조선 중기 무렵 심어진 것으로 유실수로는 드물게 장수 중
인 신비스런 나무다. 키 12m, 둘레 3m로 아직도 누에고치 30㎏을 만들어낼 만큼 왕성한
잎을 피워낸다고 한다. 구한말부터 이름이 나 일제강점기엔 ‘名桑記念碑(명상기념비)’까
지 세워져 지금껏 전해오고 있다. 예로부터 뽕나무는 뿌리부터 잎까지 버릴 것이 하나 없
다고 했는데, 그중 뽕잎은 누에의 먹이로 잠사업의 알파였다. 현대 들어 뽕잎은 당뇨와 고
혈압, 콜레스테롤 등 성인병 예방에 좋다고 알려지면서 대용 차(茶)로 사랑받고 있다. 사
실 뽕나무는 함창만의 별난 상품이 아니라 농상(農桑)이라 해서 농경사회를 이끌었던 나
라의 근간이었다. 때문에 파생된 단어도 여럿이다. 대표적으로 ‘조금씩 침략하여 먹어 들
어간다’는 뜻의 잠식(蠶食)은 누에가 뽕잎을 먹는 모습에서 착안해 나왔다. ‘가난한 집’을
뜻하는 상호(桑戶)는 옛 빈농들은 집을 지을 때 뽕나무 가지로 창문을 낸 데서 파생됐다.
또 저쪽 중국 사정을 살피면 사마천의 그 유명한 ‘사기(史記)’를 ‘잠서(蠶書)’라고도 불렀
는데, 사마천이 궁형(생식기를 없애는 형벌)을 당해 잠실(蠶室·누에 기르는 방)에 갇혀 ‘
사기’를 지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뽕나무는 오랜 세월 우리네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함께해 왔다. 뽕잎을 먹고 자라 인간에게 비단의 원료인 명주실을 내주는 누에 역시 인간
에게 일생을 고스란히 내어주는 ‘잊혀진’ 영물이다. 예부터 ‘하늘이 내려준 벌레’라고 해서
천충(天蟲)이라 불린 누에는 일생이 딱 49일이다. 알, 유충, 번데기, 성충으로 49일 동안
살면서 똥까지 인간의 한약재로 주고 간다. 누에가 뽕잎을 먹고 자라 다섯 살(5령)이 되면
한 살(1령) 때보다 몸집이 무려 1만 배나 커진다. 5령 누에가 되어 일주일 정도 지나면 명
주실 뭉치인 고치를 짓기 시작한다. 동그란 공모양의 흰 고치가 만들어지면 그 속엔 번데
기만 남는데, 번데기가 껍질을 뚫고 고치 밖으로 나오면 나방이 된다. 하지만 인간에게 명
주실을 내어주는 누에는 고치 안에서 번데기 상태로 뜨거운 물로 들어가 생을 다한다. 온
전한 생, 49일을 마저 살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의 필요에 따라 번데기에서 나방으로 나아
가면 첫 임무이자 본연의 임무는 번식이다. 암수가 만나 사랑을 나눈 뒤, 암나방은 한번에
500~700개의 알을 낳는다. 이때 경이로운 점은 최대 700개나 되는 알을 한 알도 겹치지
않게 낳는다는 사실이다. 그 알을 개미누에(1령)라고 한다. 누에의 삶은 이렇게 돌고 돈다.
그 삶 자체가 윤회(輪廻)인 것이다. 인간은 업·덕을 따져 육도윤회(六道輪廻)를 논하지
만, 인간에게 제 모든 것을 내어주는 누에에게는 일도윤회뿐이다. 일도(一道)란 ‘그저 주
고 또 주고 다 주는 것’이다. 누가 누에를 일러 한낱 벌레라 할 것인가.
④ 東學碑와 洞天岩
… 우리를 안내한 김상호 상주역사공간연구소 대표는 20년에 걸쳐 상주 일대 암각서·
암각화를 전수조사하고 전국의 것과 대조·대비한 뒤 2018년 ‘경북 상주지역의 바위글과
그림’이란 책을 발행했다. 그에게 두곡리 뽕나무 주변 특기할만한 암각서를 청했다. 東學
碑(동학비)와 洞天岩(동천암)으로 이끌었다. 내내 찡그렸던 하늘에서 봄비가 울컥하고
쏟아졌다. 덕분에 짙은 회색바위 글씨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초서로 흘러내린 두 글자 ‘洞天’. 이 글씨는 조선 전기 4대 서예가 중 한명인 봉래 양사언이 새긴 것이라 전한다. 무슨
뜻일까. 그 옆 반듯한 해서로 새긴 비석 ‘牛腹洞’이 힌트를 준다. 우복동은 조선 중기 예
언서 ‘정감록’에 등장하는 십승지 중 하나다. 동천은 단순히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을 뜻하지만, 그 시대를 비추어 보면 “동천은 이상향으로 봐야 한다”는 게 김 대표의 설
명이다. 우복동이 유사시 도피처로 삼을 만한 안전한 곳을 가리키는 십승지 중 하나인 걸
로 봐서도 그렇다. 김 대표는 “한국의 이상향은 향천사상(向天思想)으로 단순한 하늘 숭
배사상이 아닌 천인일체(天人一體) 사상으로 볼 수 있다”며 “한국의 대표적인 이상향으
로 청학동, 만수동, 오복동이 있다”고 했다. 그는 이어 “이상향으로서 우리 머릿속으로 전
래되어 온 길지가 동(洞)이고, 길지사상과는 다른 도참적 이상향이 ‘정감록’이다”고 덧붙
였다. 내처 우복동 마을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대로에서 움푹 들어간 포장길로 접어
들었다. 마을 입구와 안을 잇는 다리가 공사 중이었다. 사방 산으로 둘러싸인 비밀스러운
마을이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보일락 말락 했다. 십승지란 이름처럼 은둔마을이었다. 동
천암을 보기 전, 우리는 ‘東學碑’를 먼저 찾았다. 은척면 봉중리 마을 입구에 자리한 동학
비는 정말이지 특기할만하다. 이 비에는 ‘聖主乾坤 鳳鳴日月(성주건곤 봉명일월)’이란
큰글씨와 함께 ‘丙寅夏四月黙暗過此(병인하사월묵암과차)’란 작은 글씨가 음각으로 새
겨져 있다. 큰글씨를 풀면 ‘이 나라의 하늘과 땅은 성주(동학 세상)의 것이고, 이 나라의 해
와 달도 성주의 것이다’란 뜻이고, 작은 글씨는 ‘1926년 4월 여름에 묵암이란 사람이 지나
다가 새겼다’는 뜻이다. 이 비문이 왜 특기할만하냐 하면 봉중리에서 조금 더 안쪽으로 들
어가면 우기리인데, 이 마을엔 1,400여 점의 동학 유물을 간직한 100년도 넘은 동학교당
이 건재해 있다. 이 비문을 근거로 김 대표는 100년 전 우기리만 동학촌이었던 게 아니라
봉중리부터 우기리를 거쳐 성주봉 일대까지 동학 세거지가 된다고 주장했다. 한편 상주동
학교당과 한 형제처럼 지내던 천도교(동학의 후신)가 상주동학교당(동학의 일파)을 이단
시하며 적대시한 것은 2013년 말 상주동학교당 유물 일체가 국가기록물로 지정된 뒤부터
였다. 천도교의 이 같은 입장 변화에 대해 일각에선 이 무렵 우리 정부가 ‘동학농민혁명 기
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했고, 만일 유네스코 유산이 되면 대중의 관심
이 상주동학교당 쪽으로 기울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정부는 2017년 동학농
민혁명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신청 대상으로 선정했지만, 유네스코 심사
는 4년째 보류 중이다. 그해 한국과 중국 등이 추진해 접수한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유네
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건에 대해 일본이 강력 반발하면서 다른 건도 심사가 중단됐다.
지난 4월 유네스코는 세계기록유산 등재 절차 개편안을 확정 발표했다. 한국과 일본 간 반
목의 골은 더 깊어질 전망이다.


⑤ 취재후기
… 인간은 언제나 낙토를 꿈꾸고, 유토피아를 꿈꾸지만 그 실현은 요원할 뿐이다. 조선
후기 두 발로 낙토를 찾아 나선 청화산인(淸華山人·이중환이 상주 청화산을 사랑해 붙
인 자호) 이중환의 ‘택리지’를 읽고 발문을 쓴 다산 정약용은 이렇게 갈파했다. “풍속이 문
(文)만 숭상하면 말썽이 많고, 무(武)만 숭상하면 싸움질이 많게 되며, 상리(商利)만 숭상
하면 백성들이 간사해진다. 경박한 무리가 농사만 애써 지으면 고루하면서 독살스러워진
다.” 옛사람들은 낙토를 찾아 길지를 찾아 나섰지만, 요즘 사람들은 고급아파트와 가상화
폐를 찾아 나선다. 고금의 행태에 대한 다산의 처방은 이렇다. “사대부로서 터를 차지하여
후세에까지 전하는 것은 상고 시대 제후에게 나라가 있는 것과 같은데, 이리저리 옮겨 살
다가 능히 크게 떨치지 못하면 나라를 잃어버린 자와 같게 된다.” 내 집이 곧 명당이요, 내
가 사는 고장이 곧 낙토라는 신실한 믿음만큼 중한 것은 없다는 뜻일 게다. 안분지족이 만사형통의 근본임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 동학비.
▲ 한국한복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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