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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미술관’이 대구에 오지 않을 수 없는 이유

  • 입력 2021.06.07 00:00
  • 기자명 유명상 대구한국일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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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의 고향은 대구다. 1938년 대구에 ‘상회’라는 꼬리표를 달고 문을 열었다. 본사가 서울에 있
고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기업으로 성장한 만큼 대구와 사뭇 멀어진 듯하지만, 그럼에도 삼성
의 DNA 속에 남아 있는 대구의 흔적은 뚜렷하다.
삼성이 가진 국제적 감각의 모태는 대구다. 구한말의 대구는 약재에 관한 한 국제 무역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선 후기 동남아시아를 비롯해, 유럽, 아프리카 등 세계 곳곳의 한약재와
양약재가 시장에 몰렸고, 중국과 만주, 일본의 상인들이 찾아올 정도로 유명세를 떨쳤다. ‘삼성상
회’는 도시의 전통과 저력을 고스란이 흡수해 사업 초기부터 중국과 일본, 동남아시아 등지로 상
품을 수출했고 1950년에는 국내 무역업계 1위에 올라섰다. ‘삼성상회’ 혹은 ‘삼성물산’이 가졌던
국제적 감각도 대구와 무관하지 않다.
이런 국제적 감각이 폭발적으로 증명된 사건은 국채보상운동이었다. 이병철이 상회를 설립하
기 30년 전, 대구에는 거대한 ‘국제적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경제 구국운동인 국채보상운동이
었다. 모금으로 나라를 구하자는 캠페인이었다. 구한말 상투를 튼 사람들이 ‘국채’라는 개념을 이
해하고 이를 위해 구체적인 행동에 나섰다는 것은 그만큼 바깥 세상에 관심이 많았고 또한 지식
이 두터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국채보상운동을 계기로 도시민 전체가 국제정세와 세계 경
제 등을 공부했을 것이다.
이 사건에는 묘한 기시감이 드는 요소가 하나 있다. 바로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서상돈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보부상의 우두머리였고 그가 거느린 보부상이 800명이었다. 고려말의 거상 백달
원도 800명의 보부상을 거느렸다. 그는 800명의 보부상과 함께 이성계를 도왔다고 알려져 있다.
조선이 일어설 때, 그리고 망국의 위기 상황에서 두 팔을 걷고 나선 거상과 함께한 상인의 숫자가
정확하게 일치한다. 둘 모두 보부상의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만큼 정확한 데이터 없이 대략 800
명쯤 될 것이라고 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일기는 하지만, 800에 담긴 특별한 의미가 운동
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었을 것이다.
대구민의 의기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산업시대를 거치면서도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 증거가 1997년 IMF의 위기에서 시작된 금모으기운동이었다. 실물 경제에 미친 영향보다 경제
적 파국에서 희망의 메시지를 쏘아올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은 캠페인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을
시작하고 전국화한 지역민의 정신이 재현된 사건이었다.
800 보부상의 도시에서 성장한 회사답게 이병철ㆍ이건희 회장 모두 극일에 관한 한 결연한 의
지를 보였다. 이병철은 일본의 경제평론가 하세가와 게이타로에게 “일본을 능가하고 싶은 것이
내 진심”이라는 말을 했다. 지난해 이건희 회장이 서거하면서 삼성 전직 CEO들은 입을 모아 “이
회장은 돈벌이에 무실했다. 머릿속에 ‘극일’과 ‘초일류’뿐이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재용 부회
장의 2019년 일본의 반도체 장비 관련 수출 규제에 맞서 국산화 작업에 들어갔을 때 협업하는 중
소기업이 100% 국산화를 요청했을 정도로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일본의 수출 규제와 관련해 삼성을 비롯해 우리 기업이 보인 결연한 태도와 대응은 대구를 중
심으로 일어는 극일 경제 운동인 국채보상운동을 다시 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서상돈이 앉았
던 자리에 그가 활동한 도시에서 탄생한 삼성이 앉아 진두지휘하는 듯한 기시감을 느꼈다는 대
구 시민들이 적지 않았다. 요컨대 국채보상운동에서 또렷하게 드러난 국제적 감각과 극일의 의
지, 상인의 사회적 책무에 대한 인식은 삼성상회의 직원들에게 나아가 오늘날의 삼성의 정신에
도 고스란이 흘러들었다.
아쉬운 것은 대구에 남아 있는 삼성의 흔적이다. 삼성의 고향이자 상인의 전통과 시민운동 등
으로 삼성의 정신적 기반을 구축한 공로에도 불구하고 삼성과 대구의 인연을 역설하는 시설물
이 거의 없다. 옛 삼성상회터를 기리는 조형물과 제일모직 기숙사를 개조해 만든 삼성창조경제
센터가 거의 전부다.
이번에 이런 아쉬움을 만회할 계기가 마련됐다. 고 이건희 회장이 상당량의 미술품을 국가에 기
부했다. 기부한 미술품으로 채운 미술관은 기업의 사회적 책무의 상징으로 여겨질 만하다. 대구는
국가와 공동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 기업과 시민이 어떠한 태도와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여러 번
모범을 보인 도시다. 이는 사회적 책무에 대한 고인의 뜻이 고스란이 담길 삼성 미술관이 왜 대구
와 어울리는가에 대한 정확한 대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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