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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때 7급 군무원 특채도 거절하고 이용 외길 걸어왔죠”

25년 만에 명장 된 이용사 최원희 명장“

  • 입력 2021.06.07 00:00
  • 수정 2021.06.07 16:20
  • 기자명 김채은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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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번이나 실패했습니다. 선생님 이번에는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

맞선을 앞둔 남성이 최원프리모를 찾아왔다. 감쪽같이 본래 머리 같은 가발을 맞춘 그는 결국 결혼에 성공했다. 결혼 후 가발이었음을 밝히자 아내는 깜짝 놀랐다. 가발이라고 생각지도 못할 만큼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부부는 지금까지 잘살고 있다.
최원희 명장(65·최원프리모 대표)은 대구 유일 이용 명장으로, 가발 분야에서 일인자다. 다양한 이용기술이 존재하지만, 손님의 젊음을 되찾아주는 이용 명장은 최 명장이 유일하다. 가발은 탈모 고민이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패션 및 건강을 위해서도 이용되고 있다. 방송용 가발도 있다. 배우 양택조 씨는 방송 촬영에 필요한 가발을 최 명장에게 부탁해 제작했다.

 


 

준비된 이발병, 군 사령관 전속 이발병이 되다
“원희야, 내가 군대 가보니까 보직 중에 이발병이 제일 괜찮더라! 너는 나중에 꼭 이발병으로 가라.”
농사꾼으로 살던 삼촌은 입영통지서를 받고 군대에 들어갔다. 몇 달 뒤 휴가를 나온 삼촌은 수척해진 얼굴로 어린 조카에게 이발을 배워두라고 신신당부 당부했다. 평소 자신을 아껴주던 삼촌의 조언을 들은 15살 최 명장은 그 길로 동네 이발소에 들어가 7년 동안 일을 배웠다. 처음엔 허드렛일만 해야 했다. 입대 때는 계획대로 이발병으로 들어가 병사들의 머리 손질을 담당했다. 이발병으로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군 사령관(중장) 전속 이발사를 뽑는다는 공고가 났다. 본래 있던 전속 이발사가 제대하면서 기회가 온 것이다. 한강 이남의 ‘이발 좀 한다’는 병사들은 모두 시험에 응시했다. 지원자 중에는 최 명장보다 일찍 이용을 시작한 사람은 없었다. 자신감 있게 면접에 임한 결과 전속 이발사로 선발될 수 있었다.
‘사령관 전속 이발사’라는 이름표는 관심의 대상이었다. 체육대회가 열리면 간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간부들은 사령관 전속 이발사에게 머리 손질을 맡기고 싶어 했다.

“혹시 내 머리도 좀 다듬어 줄 수 있겠나?”
머리 손질을 마치고 나면 고맙다면 군 쿠폰을 내밀었다. 그렇게 모은 쿠폰은 PX에서 돈으로 바꾸니 주머니가 두둑해졌다. 사령관의 전용 이발사라는 타이틀 덕이었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제대할 때가 됐다. 최 명장이 마음에 쏙 든 사령관이 말했다.
“자네, 제대 후 특별한 계획이 없으면 여기서 계속 지낼 생각 없나? 7급 군무원 시켜주겠네.”
안정된 직장을 제의를 받자 구미가 당겼다. 하지만 이내 군무원은 자신의 길이 아닌 것 같았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로 여겨졌고, 그런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일하는 분야에 있어 최고가 되고 싶었다. 군무원 제의를 정중히 거절하고 제대 후 무전여행을 하며 앞으로 무엇을 하면서 살지 고민했다. 어릴 적 꿈이었던 경찰관 시험에 도전해볼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가 내린 답은 이용이었다. 이용사를 하지 않을 이유보다 하고 싶은 이유가 더 많았다. 다른 사람의 머리를 다듬으면서 느꼈던 뿌듯함과 만족스러운 고객들의 표정은 그의 가슴을 뛰게 했다. 그리고 이용을 한다면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25년 안에 최고의 이용사가 되어서 세상에 내 이름을 떨쳐보자!”
무전여행을 마치고 이용사 자격시험을 준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용사 자격시험은 몇 차례나 낙방했다. 자신보다 실력이 부족해 보였던 사람은 합격하고, 본인은 번번이 불합격했다. ‘이게 말이 되나? 도무지 납득이 안 되네.’ 심사기준이 무엇인지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떤 것이 부족한지조차 알 수 없어 답답한 노릇이었다. 심사의 기준이 명확하기보다 심사위원의 주관에 따라 심사가 이뤄지는 것 같았다. 대구에서는 합격하기 어렵다고 느껴져 대전에 가서 시험을 쳐 자격증을 얻었다. 최 명장은 자신이 이용사 자격시험 심사위원이 된다면 수험자들이 납득할 수 있는 공정한 평가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실제로 12년 후 그는 이용사 자격시험의 감독관이 됐다. 이외에도 기능장 심사위원과 기능경기대회 심사위원 등의 이용 관련 심사위원을 수차례 맡았다. 그는 자신이 대회를 하면서 느꼈던 불합리함을 수험자들이 느끼지 않도록 심사기준을 명확하게 만들었다. 심사위원의 주관성이 개입될 요소를 줄이고, 수치로 평가 가능한 요소를 늘렸다.
자격증까지 취득한 최 명장은 1982년 평리동에 이발소를 차렸다. 그의 가게는 직원을 서너 명 둔 동네에서 가장 큰 이발소였다. 사령관 전속 이용사를 하면서 벌어들인 수입 덕에 27살의 젊은 나이로 큰 이발소를 차릴 수 있었다. 가게는 손님으로 북적였고 한 달 수익은 80년대 공무원 월급의 5배 이상이었다.

가발이 코미디 단골 소재가 된 이유
최 명장은 30대 중반에 탈모 증상이 나타났다. 심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가발 산업이 막 일어서는 시기였고, 기성품으로 나온 가발이 많았다. 최 명장 역시 기성품을 구매해 착용해 봤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착용했을 때 형태가 자연스럽지 못할뿐더러 쉽게 벗겨졌다. 이렇게 애로 사항이 많던 가발은 90년대 코미디 프로그램의 단골 소재가 됐다. 프로그램을 보던 최 명장은 ‘쉽게 벗겨지고 티가 나면 가발이 제 효능을 못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가발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감쪽같은 가발을 만들어보자는 목표가 생겼다.
“가발도 이용 기술 중 하나이고, 제 머리에 써보면 되니까 연구하기 좋은 조건이었죠.”
최 명장은 본격적으로 가발 기술 연구에 들어갔다. 우선 가발을 착용한 사람들을 관찰하며 애로 사항을 고쳐나갔다. 가발을 썼을 때 자연스럽지 못한 곳은 이마에서 시작되는 뿌리 부분과 가르마 선이었다. 이에 최 명장은 이마 끝에서 시작되는 가발 앞부분을 탈색해 피부색처럼 만드는 기술을 개발해 냈다. 티가 안 나는 자연스러운 가발을 만드는 데는 성공한 것이다.
“착용하고 벗는 게 번거로운 데 벗지 않고 일상생활이 가능한 가발을 만들어보자.”
그는 벗을 필요는 부착식 가발을 만들기 위해서 많은 공부가 필요했다. 피부에 무해하고 접착력이 좋은 접착제를 찾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는 대학병원 교수, 의사를 찾아다니며 피부에 쓰기 적합한 접착제를 문의했다. 시행착오도 많았다.
“좀 더 쎈 걸로 붙여주세요.”
접착력이 괜찮다 싶은 접착제를 가지고 손님에게 가발 시술을 해주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고 가발이 떨어졌다며 다시 찾아왔다. 다시 붙여서 보냈는데 며칠 뒤 같은 이유로 다시 찾아왔다. 2번이나 다시 시술하고 나서야 더는 떨어지지 않았다.
“전구를 발명한 에디슨도 많은 실패를 거듭한 끝에 전구를 발명해냈죠. 실패를 겪을 때마다 더 집요하게 분석하고 매달렸죠.”
1999년 가발을 쓴 채로 머리도 감고 잠도 잘 수도 있는 부착식 가발을 만들어 냈다. 이 외에도 건강 가발, 인성작용 형상기억 가발, 탈부착이 편리한 가발 등을 만들어 내며 국내 가발 기술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현재 최 명장의 이름으로 4개의 특허, 3개의 실용신안, 25개의 디자인이 등록돼 있다.
그는 항상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늘 목표를 달성해 냈다. “이루고자 하는 것이 있으면 그 주변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 그의 좌우명이다. 그리고 집요한 그의 성격도 목표달성에 한몫했다.
“성공의 비결을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은데, 아주 간단해요. 성공할 때까지 절실하게 매달리면 됩니다.”

 
 

 

배움에 관한 열정으로 이룬 결과
그는 배움에 대한 열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이발소를 운영하면서 신기술을 배웠고, 95년에는 서울직업전문학교 최고경영자과정, 한국기술교육대학 교육과정 등을 이수했으며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해 대구공업대학교 헤어디자인학과를 진학하였으며 졸업 후에는 대구공업대학교 외래교수, 호산대학교 석좌교수로 위촉받아 후진들에게 강의도 하였고, 초중고를 다니며 10여년간 40,000여명의 청소년들에게 청소년직업진로지도도 하였다. 그리고 장인정신으로 임한 가발 연구 및 제작은 국가로부터 인정받아 지난 2002년 이용명장으로 선정됐다. 이는 전국에서 2번째로 선정된 이용직종 명장이었다.
“저는 제 꿈을 모두 이루었습니다. 이제 제가 가진 기술을 후배 이용인들에게 전수하며 후진 양성에 힘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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