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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주고 싶어서 주는 일

이진숙 '클럽리의 문화마당'

  • 입력 2021.06.07 00:00
  • 수정 2021.06.07 16:18
  • 기자명 이진숙 전 '클럽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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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숙 전 '클럽리' 대표

 

시골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많다. 마을 한가운데에 느티나무 한 그루가 우람차게 서있다. 키는 하늘에 닿을 만큼 크고, 턱 버티고 있는 형세는 기운이 넘치고 웅장하다. 꼭대기에 걸려있는 둥지로 까치가 부지런히 들락거린다. 초록의 싱그러움이 낮은 가지의 가장자리부터 번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빼곡해져서 둥지가 보이지 않을 정도다.
시골의 봄은 낮에도 밤에도 눈부시다. 저수지가 햇빛을 받은 윤슬로 반짝거리고, 물위에는 건너편 풍경이 반사되어 아른거린다. 한적한 오솔길을 걸으면 마음이 푸근해지고, 눈은 새와 나무를 쫒아간다. 새벽에 창문을 열면 방금 만들어진 것 같은 신선한 공기를 맛볼 수 있고,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 휘황하게 밝은 달빛을 목격할 수도 있다.
곳곳에 아름다운 말도 있다. 산책길에 만난 이웃이 “봄 부추는 사위도 안 준다.”면서도 선뜻 부추를 베어준다. 하얀 꽃이 예쁘다니까 사양할 틈도 주지 않고 “가져가서 심으라.”며 송두리째 뽑아준다. 알은체를 했더니 할머니가 뜯고 있던 나물을 내밀고, 쭈뼛거리니까 “삶아서 무치면 부들부들 물렁물렁 맛있다”며 두 팔에 안겨준다. “지난 가을에 말려놓은 곶감이니 먹어보라”고 나눠주고, “겨울배추는 지금 먹어야 맛있다”며 뜯어준다.
아주머니가 “멀리 사는 딸에게 먹이고 싶다”는 취나물을 잔뜩 담아준다. 갚을 게 없다며 미안해하면 “우리 집에 다 있는데, 뭘.”하기도 하고, “나도 예전에 많이 받았다”고도 한다. 비어있는 우리 집에 할머니가 그릇을 놓고 가기도 하는데, 선 채로 손으로 집어먹는 머위무침이 봄기운을 가득 전해준다.
낯선 사람에게 “잘 어울릴 것 같다”면서 “옷을 주고 싶다”는 사람까지 있다.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했고, 왜 그러는지 몰라 의아했다. 나에게서 뭘 바라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아리송한 마음으로 거절도 못 한 채 끌리듯 집까지 따라갔고, 얼떨결에 손수 염색해서 직접 바느질한 옷을 받았다. 다른 말은 없었고, 그래서 신기했다. 시골에서는 ‘그저 주고 싶어서 주는 일’이 일어난다.
“Language is a living thing.”
언어는 살아있는 것이다. 말이 삶을 말해준다. 말은 사람의 마음을 전하는 도구이고, 사람살이의 모습을 보여주는 창이다. 조용하고 고요한 시골이 그저 가만히 있는 게 아니었다. 사람의 마음이 살아 움직이고, 아름다운 말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거였다. 소리도 내지 않고 아름답게 살고 있는 거였다.
“낯선 곳에서의 삶은 그곳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따라 결정된다.”(김정운, ‘바닷가 작업실에서는’)고 했던가. 그들의 아름다운 말 덕분에 시골에서의 삶이 따뜻하고 훈훈해진다.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리며 말랑말랑해진다. 가슴이 부풀어 오르고 자꾸 신이 난다. 나물을 두 팔 가득 감싸 안은 바람에 휴대전화를 받지 못하면서도 히죽히죽 웃음이 난다. 발걸음이 몽실몽실 가벼워지고, 이따금 꿈을 꾸는 것도 같다.
아름다운 말이 살아있는 것은 시골의 저성장 때문인지도 모른다.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에 살면서, 눈부신 윤슬과 덩그런 달빛을 놓치면서, 우리는 아름다운 것들로부터 참으로 멀리 와버린 것만 같다. 보통의 말이 특별한 말이 되고, 서로를 챙겨주고 챙겨 받는 행위가 대수로워진 세상으로 말이다. 어떻게 사는가는 마음 씀씀이에 달려있는지도 모른다. 바쁘게 사느라 마음에 여유가 없고, 손익을 따지느라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헤아리고 재느라 마음껏 마음을 내지 못한다. 산다는 것은 마음을 먹는 일이고, 마음을 쓰는 일이다. 그저 지금보다 조금만 더 너그럽게 살아도 되지 않을까. 그저 지금보다 조금씩만 더 퍼주면서 살아도 되지 않을까.
시골에서는 대문을 반쯤 열어놓고 산다. 볼일이 있으면 들어오라고 하면서 서로의 집을 들락날락하며 산다. 아름다운 말들이 빈번히 오고가고, 주고받는 일들이 흔하게 일어난다. 나도 우리 집 대문을 열어놓는다. 대문을 열어놓으면서 마음도 같이 열어놓는다. 마음속으로 사람 사는 맛이 마구마구 들어오도록.

 

이진숙 전 ‘클럽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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