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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을 읽으면 나쁜 책을 즐길 수 없게 되는 법

이진숙 ‘클럽리의 문화마당’

  • 입력 2021.05.09 00:00
  • 수정 2021.05.10 14:27
  • 기자명 이진숙 전 '클럽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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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친구의 아트 클래스에 따라갔다. 오래된 집에서 노부부가 반갑게 맞는다. 들어서자마자 집주인이 차 한 잔을 권하고, 사람들은 찻잔을 손에 든 채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는다. 화분들이 모여 있는 부엌이 아늑하다. 창가는 히터가 가깝고 햇볕이 잘 들어 식물들의 병원이란다. 촛대도 곁에 나와 있다. 촛불 켜진 식탁을 상상하면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우리 집 촛대가 떠올랐다.
집 뒤편에는 키 큰 나무들로 가려진 그들만의 정원이 있고, 나무 아래에는 벤치와 의자들이 놓여있다. 햇볕이 포근하고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날, 차 한 잔을 곁에 두고 책을 읽는 즐거움을 상상했다. 밖이 훤히 내다보이는 컨서버터리(천장과 벽을 유리로 만든 공간)에 파라솔들이 활짝 펼쳐져있다. ‘파라솔을 바깥에서만 사용하라는 법은 없다’는 듯, 화려한 분홍색 파라솔이 단박에 밝은 기운을 선사한다. 실내의 파라솔 풍경이 생경하면서도 “Why not?(안 될 게 뭐람)”하게 한다.
그림을 그려본 경험이 없는 남녀노인들이 모였다. 파라솔 밑에 앉아 탁자 위의 꽃과 과일을 그리는 거다. 어떻게 그려야할지 몰라 막막해하는데 누군가 말했다. “It’s just a piece of paper(그저 종이 한 장일뿐이야)”라는 말 한마디가 모두를 홀가분하게 한다. “화요일을 이렇게 보내서 즐겁다”고 하고, “그냥 차 마시고 얘기만 하는 게 아니라, 관심 있는 것을 함께해서 좋다”고도 한다.
점심시간 역시 즐겁고 좋았다. 각자 들고 온 음식으로 함께 차렸는데, 키시(달걀, 우유에 고기, 야채, 치즈를 섞어 만든 파이의 일종), 빵, 치즈, 와인, 크랙커, 과일 샐러드가 푸짐하다. 내가 가져간 잡채는 글래스 누들(투명한 당면)이라며 신기해했고, 선물로 가져간 ‘얼굴 팩’은 인기가 있어서 남자들도 챙겨갔다. 남자와 여자, 주인과 손님,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대화가 격의 없다.
뒷정리도 함께하는 게 당연했다. 각자 빈 그릇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물건을 제자리에 놓는 행동이 몸에 밴 듯 자연스럽다. 정원에 나가 빵 부스러기가 떨어진 식탁보를 탁탁 터는 모습에서는 보자기를 들고 먼지를 털어내는 우리네 모습을 연상했는데, 정원에 놀러오는 새들을 위한 거라고 해서 놀랐다. “우리는 같이 산다”며 새들을 챙기는 배려가 세심하다.
영국친구가 내게 “Thank you for causing fun(‘재밋거리’를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감사합니다”를 주고받는 나라에서 처음 들어보는 인사말이다. 친구들을 다시 만났을 때 서로 나눌 ‘이야깃거리’를 만들어줘서 고맙고, “얼굴 팩을 했는데도 주름살은 그대로네”라며 서로 놀릴 수 있는 ‘웃음거리’를 줘서 고맙다는 거다.
따라하고 싶은 노인들의 모습을 보았다. “Reading good books ruins you for enjoying bad books(메리 앤 세퍼와 애니 배로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 클럽’)” 좋은 책을 읽으면 나쁜 책을 즐길 수 없게 되는 법이라는데, 밝고 건강하게 삶을 즐기는 노인들을 보니 이런 걸 목표로 해도 좋을 것 같다.
늙음은 끝없이 지루해지는 일이다. 또 공허하고 외로운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잘 알면서도 더 나아지기만을 바라며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어쩔 줄 몰라 끙끙대기만 하고 그냥 세월을 흘려보낸다. 가만히 두면 매일 매일이 똑같은 날들의 연속일 거다. 내 앞날을 지루함이 압도하기 전에 좀 다른 날을 만들면 안 될까? 원치 않는 시간이 도래하기 전에 내가 바라는 시간을 만들면 안 될까?
‘잘 나이 들기’를 목표로 ‘삶의 태도나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는 거다. 과거가 아닌 현재와 미래에 집중하고, 걱정과 불평보다는 희망과 행복을 말한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나의 삶을 이야기하고, 내가 한 일이 아닌 나의 느낌을 표현한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과 멋진 것을 탐구하며, 여태 미루고 망설였던 해보고 싶은 것들을 해본다. 재밋거리를 구상하고 살맛나는 시간을 설계하는 거다. 누군가 “이런다고 잘 나이 드느냐?”고 묻는다면, “인생은 사는 거다.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라고 답하고 싶다. 그리고 “안하면 뭐 할 건데?”라고 묻고도 싶다. 이진숙 전 ‘클럽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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