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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구는 대한민국이 종주국인 국민스포츠입니다”

이 사람 이용대 대구시족구협회 고문

  • 입력 2021.04.01 00:00
  • 수정 2021.04.01 11:18
  • 기자명 김재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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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구는 삼국시대부터 우리민족의 놀이문화에서 발전된 대한민국이 종주국인구기종목이다. 우리나라는 배구 경기장에서 네트를 하단으로 내리고 변형된 족구경기를 하게 됐고, 국군체육대회와 공기업이나 산업체에서 근로자들이 족구를 하면서 점차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용대 대구시족구협회 고문을 만나 족구발전의 역사와 흐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족구가 구기 종목 스포츠 중 유일하게 대한민국이 종주국이라는데
정확하게 언제부터라고 명시 하기는 어렵지만 족구는 배구경기장에서 사용
하는 네트를 하단으로 내리는 등 변형된 형태로 이어져 왔다. 경기를 해왔다.
1968년 안택수 공군 대위가 국군체육대회에 족구경기를 하기 위해 족구규칙
을 만들어 경기를 했다고 해 공군에서 창안됐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는 사실
이 아니다. 세부적으로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부분이 있긴 했지만 훨씬 이전에
도 공기업과 산업체에서 직장인들이 활발하게 족구를 했다.
-족구경기의 통일된 규칙은 언제부터 적용됐는가
1990년도에 대한족구협회가 출범하고 각 지역을 대표하는 족구인들로 구성
된 ‘경기규칙심의위원회’가 발족했다. 전국 각 지역에서 적용하던 규칙을 모두
검토해 2년여의 시간 동안 검토를 거쳐 통일된 족구규칙을 만들었다. 사실상
현대족구의 출발점이었다.


군인, 근로자 중심으로 보급 확대, 경기 규칙도 확립
유사종목과 뒤섞이면 안돼, 종주국 자존심 지켜야
족구 원로들 헌신적 노력 바탕 … 세계화 앞장서야


-유사종목 단체들과 갈등도 많았다 들었다
세팍타크로 단체에서 ‘극동식족구’라는 명칭을 붙이고 족구를 변형시키는 행위
를 하다가 정통 족구인들과 분쟁이 있었다. 여러 논쟁 끝에 결국 세팍타크로 측에
서 족구는 완전히 다른 종목임을 인정했다. 이후 세팍타크로 산하 족구연맹을 분리
해 대한족구협회 조직으로 운영이 됐다. 몇 년 전부터는 풋넷이라는 유사종목에 족
구를 들러리로 참가시키거나 유사종목을 족구 대회장에서 경기를 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족구는 민족구기로서 자긍심을 가지고 세계적인 종목으로 발전시켜야 가
치가 있는 것이지 유사종목과 뒤섞여 국적 불문으로 만들면 안된다.


-족구 활동은 언제부터 했는가
1980년 대한중석에 입사를 하면서부터 족구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1984년 강
원도에서 생활체육을 시작으로 88서울올림픽 이후 삼성, 현대, 대우 등 그룹형태
의 모든 기업체에서 직장 내에서도 족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들과도 자
연스럽게 교류를 하게 됐다. 또 1990년 대한족구협회가 출범하면서 다양한 활동
들을 해왔다.


-족구원로인 이용대 고문은 초대 최초라는 수식어로 많이 붙는다
90년도 대한족구협회를 결성 당시 대구경북협회장을 맡았다. 당시 근무하던 기
업이 있었던 달성군이 1995년에 대구시로 편입되면서 97년에 대구시족구협회를
창립, 초대회장을 맡았다. 1999년 대구시생활체육회 정식단체로 인준을 받고 초대
회장을 역임했고, 전국 직에서 족구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지도자회도 만들어 초
대와 2대 지도자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족구방송도 이용대 고문님이 최초로 시작했다고 하는데
2001년 3~9월 MBC의 족구방송경기를 주최 주관해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정규
방송의 족구경기가 중계됐다. 경기 방영시간대도 황금시간인 매주 금요일 저녁 7
시였다. 당시 족구마왕전이라고 경기 명칭을 정하고 다른 종목 선수 4명과 족구선
수 1명이 붙는 1대4 족구경기를 했는데, 어떤 종목의 선수들도 족구선수 1명을 이
기지 못했다. 그 덕분에 다른 종목에서도 족구에 대해 인정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
기도 했다.


-전국족구단체 임원 활동 당시 이사회나 각종 회의에 많은 서류를 챙기고 준
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전국단체조직이 출범한 초기 힘든 일이 많았다. 임원들 가운데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면서 일부 갈등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 때문에 철저한 준비와 자료 없이
는 올바른 회의진행이나 논리적으로 정확한 주장을 하기 힘들어 더 꼼꼼하게 체크
했다. 또 80년대 초부터 노동운동을 하면서 교섭테이블 석상에서 발언하거나 회의
진행을 많이 하다 보니 그러한 습관들이 몸에 밴 것 같다.


-족구의 세계화를 위해 추진한 부분은 어떤 게 있나
90년대엔 전국대회에서 우승하는 팀들을 해외로 파견했고, 해외교민들과 교류
전 경기도 열었다. 2008년 영국에서는 제1회 재영한인회 족구대회를 개최했고, 유
럽에 족구 해외지부를 만들어 족구 역사와 경기 규칙을 보급했다. 또 2010년 대구
에서 열린 세계소방관경기대회에서 족구를 정식 종목으로 채택해 해외 28개팀이
참가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족구와 관련해 존경하는 인물이 있는가
초창기 전국 조직을 결성할 당시 애쓰신 분들이 참 많다. 그 중에서도 족구단체
가 어려울 때 회장직을 맡았던 고 정덕진 회장을 비롯해 김성관 회장, 이정수 회장
도 많은 공로가 있다. 이런 분들이 있었기에 현재의 족구가 있을 수 있었다. 대한민
국에서 족구활동을 하고 있다면 족구원로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대한 과정을 기본
적으로 알고 있어야 한다.


-족구단체의 발전과 운영에 대하여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족구인들이 민족구기로서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현재의 족구가
있기까지의 족구발전 역사를 제대로 인식했으면 좋겠다. 족구에 모든 것을 바쳐
온 족구인의 한 사람으로 민족구기인 족구가 세계적인 종목으로 발돋움 할 수 있
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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