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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의 즐거움을 찾는 일

이진숙 '클럽리의 문화마당'

  • 입력 2021.04.01 00:00
  • 수정 2021.04.01 10:57
  • 기자명 이진숙 전 '클럽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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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숙 전 '클럽리' 대표

 

처음 본 영국은 우울하고 쓸쓸했다. 겨울인데도 비가 연일 주룩주룩 내렸고, 습기를 머금은 추위가 온몸을 파고들었다. 어둑했던 낮은 오후 4시가 되니 아예 캄캄했다. 세월을 짐작할 수 없는 낡은 건물들로 거리는 무겁게 가라앉았고, 웃지도 않고 무뚝뚝한 사람들은 우산도 없이 걸었다. 시골에는 살아본 적도 없는데, 푸른 잔디 위에 하얀 양떼가 보이는 곳에서 살 거라니 암담했다.


도착하자마자 게스트하우스에 묵었다. 200년이나 된 고급숙소가 실내는 어두웠고, 마루에서는 삐걱삐걱 소리가 났고, 침대는 낡아서 푹 꺼졌다. 좁은 부엌만 현대식으로 바꾸었을 뿐, 모든 게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된 곳이었다. 처음 살던 집 역시 작고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집 뒤편에는 가꿀 줄도 모르는 정원이 딸려 있었고, 부실한 히터와 구식창문은 추위를 막지 못했다. 찬물과 더운물이 각각인 수도꼭지는 설거지를 할 때도 샤워를 할 때도 불편했다.


어떤 여행은 인생을 바꾼다고 하는데, 지금의 나는 영국이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 도착했을 때만 해도 내가 영국이라는 나라에 이토록 마음을 빼앗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제 영국에 가면 ‘평화’와 ‘행복’을 만나는 것 같다. 변함없는 곳은 익숙해서 편안하고, 내 것이 된 시간은 한가로우면서도 지루하지가 않다. 없는 게 많고 불편한 곳인데도 마음은 크고 넉넉해진다.


백화점과 서점의 나이가 수백 살이고, 옛날 영화 속의 거리가 지금과 똑같아 입이 벌어진다. 유서 깊은 건축물은 감탄스럽고, 자연을 닮은 정원은 은은하고, 차를 즐기는 방식은 우아하다. 푸른 들판에 흰 양떼는 평화롭고, 탁 트인 하늘과 나무만 보이는 풍경은 황홀하다. 자꾸 “뷰티플!”을 외치게 되니 걱정과 근심이 사라진다. 수년을 드나들었던 노천시장이 여전해서 신이 난다. 손때 묻은 가구를 물려주고 낡은 물건을 그대로 사용하는 이들에게 고개가 숙여진다. 시간이 돈이라는 시대에 꽃을 가꾸고 손으로 카드를 쓰는 이들이 반갑다.


일요일 풍경은 낙원을 닮은 것 같다. 날씨가 좋은 날 그들은 강에서 배를 타고, 한가롭게 떠 있는 백조와 오리를 바라본다. 크고 웅장한 나무 곁을 산책하고, 잔디밭에 누워 햇볕을 즐긴다.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와 개가 나란히 걷고, 부부가 유모차를 끌며 이야기를 나눈다. 가족들이 함께 아이스크림을 핥고, 갓난아기를 안은 아빠가 나무에 기대앉아 샌드위치를 먹는다. 남자가 나무 아래에서 책을 읽고, 노부부가 접이의자에 앉아 신문을 읽는다.


오래 살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게 있듯이, 30년 동안 영국에 드나들다 보니 저절로 좋아지는 것도 있다. 나는 이제 오래된 것도 좋고, 조용하고 바쁘지 않은 것도 좋다. 행복의 모양까지 달라져 결국 시골에 작은 집을 마련했다. 자연을 가까이에 두고 하루를 더 내가 바라는 시간으로 채우고 싶어서다. ‘좋아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정해 매일 그 일을 한다. ‘일’이 아니라 ‘행복’에 집중하고, ‘열심히 할 거야’가 아니라 ‘행복해질 거야’를 다짐한다. 그 일을 우선으로 하고, 그 일을 위해 바쁘지 않으며, 그 일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까 고민하는 대신 행복한 일을 하는 거다.


그저 내가 좋아서 하는 것뿐인데도 좋다. 매일 하니 그리 힘들지도 않다. 좋아하는 시간으로 하루를 채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앞날이 든든하다. “무료한 일상에서 무엇인가에 몰두하며 자신만의 즐거움을 찾는 일은 영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권석하, <영국인 재발견 2>)”라는 글에서 지금의 내 모습을 발견한다. 영국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 나라인데, 영국을 통해서 내가 변한 게 신기하다. 내 인생은 달라지지 않았는데, 내 삶은 달라졌고 나는 더 행복해졌다. ‘좋아하는 것’과 ‘하루를 채우는 것’이 달라진 거다. ‘좋아하는 것’이야말로 ‘나’이고, ‘하루를 채우는 것’이야말로 ‘삶’이다.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나의 하루는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지, 그리고 내 삶이 어떻게 달라지고 싶은지 말이다.

이진숙 전 ‘클럽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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