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갑자기 쓰러진 아버지... 시행사 대표가 건강식품이 뛰어든 이유죠"

  • 입력 2021.01.25 00:00
  • 기자명 김광원기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한성 아직컴퍼니 대표가 자신이 개발한 '아직보', '아직경'의 출시 배경에 대해 말하고 있다. 김민규 기자 whitekmg@hankookilbo.comm

 

아버지는 교사였다. 분필 한 자루만 들고 수업에 들어갔다. 교과서를 모두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머릿속에 저장한 교과서를 펼치고 온전히 학생들의 표정과 반응에 주목하면서 수업을 진행했다. 내가 알고 있는 최고의 교사였다. 교육은 우리 집안의 전통이었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프로필도 교장선생님이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기로 이름이 나서 지역 유지들의 도움으로 유학까지 하셨지만, 관직에 나가는 것보다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헌신하는 데 만족하셨다. 아버지가 초등학생일 때 유명을 달리하셨지만, 교육에 대한 신념과 철학은 올곧게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신종플루로 공든 탑이 와르르
"더 공부해서 교단에 설 생각을 해야지, 곁길로 세지 마라."

내가 사업을 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극구 반대했다. 사범대에 진학했던 까닭에 조금 더 공부해서 교편을 잡으면 될 것을 왜 성급하게 사업에 뛰어들었느냐는 말씀이었다. 나에겐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맏이로서 그냥 얌전히 공부만 해도 될 만큼 집안 사정이 녹록지 않았다. 아버지의 주식 투자가 화근이었다. 크게 실패를 보는 바람에 집을 월성동 주공 아파트로 옮겼다. 간호사 자격증이 있었던 어머니는 간호교사 생활을 그만둔 지 20여년 만에 다시 의료 현장에 복귀했다. 일주일 동안 연속으로 야근을 하는 등 동료 간호사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자니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두 번째는 둘째 외삼촌이라는 존재였다. 젊은 시절부터 사업을 하셨는데, 내 눈에는 외삼촌이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 없었다. 나도 언젠가는 사업을 하겠다는 꿈을 품었다. 워낙 조카들에게 잘해주기도 했지만, 부모님을 비롯해 어르신들을 깍듯하게 대하는 분이어서 나에겐 모범답안 같은 분이었다.

"부동산 한번 해봐라."

어느 날 외사촌이 부동산을 권유했다. 둘째 외삼촌의 큰아들이었다. 돌이켜 보면 이 권유가 내 인생을 바꾸었다.

하루 2시간 자면서 나만의 공식 만들어 승부
처음엔 경매회사에 들어갔지만 몇 달 만에 퇴사했다. 경매보다는 부동산 일을 하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밥값도 나를 유혹한 요소 중의 하나였다. 1,600원에 식사를 제공했다. 게다가 석 달은 공짜였다.

한 달은 아무것도 모르고 지나갔다. 서서히 원룸 임대 중개로 나섰다. 얼마 안 간 돈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매매에 뛰어들었다. 그러자 넉 달 만에 꽤 많은 업자들이 매매를 부탁해왔다. 나름대로 잘 팔리는 원룸을 분석했다. 1층에 편의점이나 상가가 있는 원룸이 제일 잘 나갔다. 권리금을 받아주면 웃돈을 얹어줬다. 매매에 서서히 눈이 뜨이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나만의 공식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동산 사업을 준비하면서 갖춘 기본 지식과 부동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쌓은 현장 지식, 여기에 다양한 이론을 접목했다. 계약 한 건을 성공하면 스스로 4일 정도 휴가를 줬다. 쉬는 게 아니었다. 공부 시간이었다. 책을 사놓고 공부하기엔 책값이 너무 아까웠다. 교보문고로 갔다.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 부동산 관련 서적들을 읽어나갔다. 휴대폰으로 책 본문을 촬영하면 직원들이 득달 같이 달려왔다. 끝까지 읽었다. 또 눈치를 보면서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전문가로 성장해갔다. 내가 생각한 전문가는 '한번 거래한 사람이 다시 찾는 컨설던트'였다. 사탕발림으로 한 건은 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이득을 보거나 능력이 있는 컨설던트라는 확신이 없다면 두 번 다시 찾지 않을 터. 그는 전문지식과 실질적인 소득을 내는 거래로 평생 고객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였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현장에서 만난 건축업자 중 70~80%는 건축사업을 로또처럼 생각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분석력이 부족했다. 내가 조금만 더 제대로 분석하고 디테일하게 설명하면 업자들을 충분히 움직일 수 있겠단 확신이 들었다.

8개월 만에 공식을 완성했다. 하루 수면시간이 2시간이 채 안 되는 날이 많았다. 그렇게 서른 살 무렵 건축업자와 시행사를 찾아다녔다. 가장 큰 난관은 나이였다. "그 나이에 뭘 알겠는가" 하는 눈빛이 얼굴을 쿡쿡 찌르는 듯했다. 분석 자료만 쏙 빼가는 사람도 있었다.

기회는 왔다. 2013년 즈음 시행 및 분양 대행을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입지를 분석해서 구매를 유도했다. 3건을 성공시켜 170여억원의 수익을 내줬다. 이 건을 계기로 내가 사는 지역에서 내 이름 석자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장 손에 들어온 돈보다 내가 만든 공식이 증명되었단 사실이 더 기뻤다. 스스로에게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나는 나만의 영업수지분석을 무기 삼아 지역 부동산 시장을 조금씩 조금씩 공략해나갔다. 이후 중심가에 10층 이상의 고층 빌딩을 비롯해 다양한 건물을 지어 올리는 시행사로 자리를 잡았다.

어느날 갑자기 아버지를 덮친 병마 "눈이 안 보인다"
2020년, 느닷없이 건강식품 사업에 뛰어들었다. 계기가 있었다. 37살 무렵, 복통이 심해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집안의 빚을 다 갚고 이제 통장에 잔고가 쌓인다 싶을 즈음에 병이 찾아왔다. 나는 암이라고 판단했다. 그럴 만도 했다. 아차 하면 몇억씩 날아가는 것이 시행사업이었다. 강박적으로 일에 몰두하다 보니 제일 예민한 위장에 자극이 갈 수밖에 없었다. 자금을 구해야 할 땐 술상무 노릇도 했다. 당장 병원에 갈 상황이 못 되어서 짓고 있던 건물을 마무리한 뒤에야 병원을 찾았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네요. 위궤양도 있고, 무엇보다 식도가 녹아내리기 직전입니다. 조금만 더 악화했으면 생명이 위험했을 것입니다."

약을 처방받았다. 스트레스를 줄이라는 권고와 함께.

"갑자기 눈이 안 보이네."

2019년, 아버지에게도 병마가 찾아왔다. 갑자기 눈이 안 보인다고 했다. 어머니가 "아버지 건강이 염려된다"는 말을 종종 하던 즈음이었다. 병원에서는 눈이 문제가 아니라 혈관질환 때문이라고 했다. 수술이 필요하다는 거였다. 의사는 "큰 수술이 아니다"고 안심시켰다. 11월에 수술을 감행했다.

그러나 수술 후 다시 찾아간 아버지는 입을 닫고 있었다. 늘 살갑게 이야기를 하시는 분인데 묵묵부답이었다. 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분필 한 자루만 들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강의를 이어가던 분이었다. 내가 뇌출혈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안타깝고 화가 났다. 어디를 향해 쏟아내야 할지 모를 분노가 가슴에 그득하게 들어찼다.

그러나 감정은 감정일 뿐이다. 현실은 차가운 이성으로 대처하는 것이 옳다. 우리 집안은 혈관계통이 모두 안 좋다. 큰아버지는 스텐스 시술을 3번이나 받았다. 집안의 고질병이었다. 꾸준히 먹으면서 건강을 관리할 수 있는 건강식품을 만들자는 생각이 들었다.

3달 만에 구상을 완료했다. 6년근 홍삼을 비롯해 '동의보감'에서 간과 신장의 기운을 돋우고 기혈 순환, 진정 작용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침향과 녹용을 비롯해 16가지 전통약재를 포함시킨 건강식품이었다. 특히 침향은 세종 임금이 '중국에서도 매우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다'면서 '일본 사람들도 아주 먼 나라까지 가서 침향을 구해온다고 한다. 설사 비싼 가격을 주더라도 반드시 구해오도록 하라'고 했을 정도로 귀한 약재다. '동의보감'에서 '찬 바람으로 마비된 증상이나 구토, 설사로 팔다리에 쥐가 나는 것을 고쳐준다'고 기록하고 있다.

처음에는 환으로 빚었다. 문득 외할아버지가 늘 환을 드시는 것이 기억난 까닭이었다. 환은 다른 형태에 비해 복용이 편하다. 불과 몇 개월 만에 반응이 폭주했고 그에 힘입어 반 년도 안 되어서 환보다 조금 굵은 알약 형태로 한 제품을 더 만들었다.

약재를 정직하게 쓰는 것과 함께 가격도 깊이 고민했다. 인터넷에 80% 세일 운운하며 올라오는 약재의 정가를 누가 믿을 수 있을까. 할인을 염두에 두지 않고, 건강을 걱정하는 이라면 누구나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적정가를 책정했다. 최소한의 이문을 남긴다는 생각에서였다. 보통 비슷한 성분을 담은 약재의 1/6의 가격에 출시했다. 내 아버지 같은 분들이 많이 드실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요즘 많이 늦제? 밥은 먹었나?"

얼마 전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수술한 지 1년여만에 갑자기 몸이 좋아지신 것이었다. 요즘은 아버지와 함께 두류공원을 산책을 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 낙이 되었다. 분필 하나로 교단에서 학생들을 휘어잡던 그 시절로 돌아오신 것 같아 너무 행복하다.

학교 앞에 아이들을 위한 교육센터 짓고 싶어
아버지는 내가 교단에 서지 않은 것을 끝끝내 서운해하시지만 나 역시 아버지만큼이나 학교에 마음이 묶여 있다. 내 꿈은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베푸는 것이다. 나락으로 떨어져 끼니 걱정을 해야 할 지경이 되었던 시절, 편의점에서 재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자주 마주쳤다. 그 아이들의 얼굴이 지금도 마음에 남아있다. 언젠가 학교 앞에 건물을 지어올리고 무료 급식에 학원 수업, 상담까지 받을 수 있는 일종의 교문 앞 방과후학교를 만드는 것이 꿈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이룰 날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영혼을 바쳐서 일해라."

아직 갈 길이 멀다. 아니, 아직 해야 할 일이 훨씬 더 많다. 아버지는 "영혼을 다 바쳐야지 작은 것 하나가 겨우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신다. 살아보니 정말 그렇다. 척하거나 시늉만으로 되는 일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

진심과 진심, 영혼과 영혼이 만나야 비로소 진척이 있다. 지금 같이 일하고 있는 회사 직원들이 바로 그런 이들이다. 오랜 세월 배신을 비롯해 이런저런 인간관계를 겪으면서 나름 검증되고 확인된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과 함께하면 어떤 일이라도 자신이 있다. 내가 진심으로 앞서 나가고 진심으로 따라와 준다면 이루고자 하는 일들이 목표한 것 이상으로 우리 앞에 다가올 일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누군가는 그것이 기적 같은 일이라고 하겠지만, 아버지가 다시 회복되어서 예전의 모습을 되찾으신 걸 보면 세상에는 기적이 없다고 할 수 없다.

<1인칭 시점으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김광원 기자 jang750107@hankookilbo.com

저작권자 © 대구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