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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트바로티 김호중의 첫 단독콘서트, 제가 열어줬죠”
김채은·홍지혜 객원기자  a@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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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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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기획자 겸 디제이 이대희(오른쪽)씨가 ‘트바로티’ 김호중씨와 함께 나란히 포즈를 취했다.

 

“우와, 내가 보낸 사연이 라디오에 나온다!”

라디오 디제이(DJ)가 손으로 써서 보낸 사연을 읽어줄지 마음을 졸이며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던 시절이 있었다. 이대희(63)씨는 7080세대의 그 시절을 함께 했던 디제이다. ‘4시의 다이얼’ ‘이대희의 음악캠프’ ‘골든디스크’ 등을 진행하며 30년 넘게 음악 방송을 이어온 지역 최장수 디제이다. 강산이 세 번 변하는 동안 좋은 음악을 소개하는 디제이에서 공연기획자와 문화계 유망주들의 성장을 돕는 역할도 해왔다. 그의 손을 거쳐간 스타 중에는 ‘트바로티’ 김호중도 있다.

1983년, 1차 경쟁률만 104:1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걸까?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저기인데.”

1983년 3월, 이씨는 국밥집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그때 식당 한켠에 켜진 흑백 텔레비전에서 대구 MBC FM 개국 공채 1기 디제이를 선발한다는 뉴스가 나왔다. 이씨는 다음날 당장 다니고 있던 무역회사를 그만두고 디제이 공채에 지원했다.

당시 디제이의 인기는 대단했다. 대구 MBC FM 디제이를 뽑는다는 소식에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렸다. 3차에 걸린 테스트를 거치니 이씨를 포함해 14명만이 남았다. 마지막인 줄 알았지만 실전 테스트에서 7명을 더 탈락시켰다. 그렇게 대구 MBC FM의 처음이자 마지막 디제이가 탄생했다.

“디제이가 진행하는 방송은 PD와 작가가 없습니다. 기획, 연출, 진행의 하나부터 열까지 디제이 혼자 소화해야 했죠. 엔지니어 역할도 해야 했기에 방송 장비 다루는 방법도 배웠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독특한 위상을 가진 존재였죠.”

이씨가 맡았던 첫 프로그램은 팝 전문 방송 ‘탑튠퍼레이드’였다. 팝에 대해 방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팝 전문 디제이’라는 칭호가 붙었다. 첫 방송까지 만반의 준비를 했다.

개국 방송 날, 활기차고 밝은 노래가 흘러야 하는 그날 라디오에선 애도곡만 틀었다. 개국 하루 전인 10월 9월에 미얀마 아웅산 묘역에서 테러 사건이 터진 까닭이었다. 하이 톤으로 수백 번을 연습했던 멘트를 읊조리는 듯한 목소리로 읽어야 했다.

“지금 여러분들께서는 대구 MBC FM 개국방송을 듣고 계십니다.”

“신음소리 나오는 노래는 틀지 마!”

초창기에는 웃지 못할 생방송 사고가 많았다. 레코드판(LP)으로 음악을 트는 시절이었기에 종종 레코드판이 문제를 일으켰다. 레코드판 두 개가 겹쳐져 도는 일, 판이 돌다가 걸려서 특정 가사만 반복되는 일 등 다양했다. 우물쭈물하다가는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4초 이상 방송에 아무 소리가 나가지 않으면 송신탑에서 무신호를 감지해 소음을 내기 때문이었다.

“여러분은 지금 생방송을 듣고 있음을 실감하고 계십니다.”

뻔뻔한 멘트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방송사고 때문에 편성부에 불려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영문도 모른 채 편성부 방문을 두드릴 때도 있었다. 방송을 마치고 나면 편성부장으로부터 지적을 듣는 건 일상적인 일이었다. 잘했다고 칭찬받는 날은 없었다. 한번은 방송이 끝나고 편성부장이 말했다.

“다음부터는 오늘같이 이상한 신음소리 같은 게 나오는 노래는 다시는 틀지 마.”

그날 튼 노래는 도나 서머(Donna Summer)의 ‘I feel love’라는 노래였다. 음악의 자유로운 예술인데, 당시 편성부는 보수적인 생각이 강했다. 다채로운 음악을 소개하고픈 이씨는 편성부와 종종 의견 충돌이 있었다. “오늘까지만 하고 반드시 그만둔다”는 말을 몇 번이나 되뇌었지만, 방송국을 나오면 곧장 다음 방송에 어떤 음악을 틀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디제이는 천성이었다.

“골든디스크 한번 진행해 볼래?”

1997년 3월, 골든디스크를 시작했던 날을 잊을 수가 없다. 편성 회의에 다녀온 팀장이 그에게 물었다. 올드팝 장르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어서 팝 전문 디제이가 반드시 필요했다. 시작 전부터 자신이 있었다. 한가지 예상치 못했던 것은 신생 프로라는 사실이었다. 다른 방송은 중간에 광고가 있어 광고가 나가는 동안 디제이가 쉴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신생 프로그램이다 보니 광고가 하나도 없는 채로 진행했다. 방송 시작부터 종료까지 숨 돌릴 시간도 없었다. 맨땅에 헤딩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지칠 때마다 ‘이건 내 프로다. 이건 내가 만드는 프로그램이다’는 생각을 되뇌었다. 그렇게 3개월을 광고 없이 1시간을 채워나갔다. 4개월이 지나서야 광고가 들어오자 “이제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골든디스크를 진행하는 동안 팬레터도 많이 받았다. 삐뚤삐뚤한 글씨로 한 글자씩 적어 내려간 편지에는 정성이 가득했다. 그림도 그려 넣고, 수도 놓아서 어떤 마음으로 팬레터를 썼는지 느낄 수 있었다. 받은 엽서들은 모두 모아서 집에 가져다 놓았다. 골든디스크에 들어온 사연 중 “골든디스크를 대학생 때부터 들었는데 지금은 딸이 대학생이에요”라는 내용도 있었다. 이씨는 이 같은 사연이 들어올 때면 새삼 골든디스크의 나이를 실감한다고 말했다.

막막한 시작과 소중한 추억을 함께한 골든디스크에 느끼는 애정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지난해 2월을 끝으로 골든디스크가 끝났다. 골든디스크 마지막 방송 때는 추억과 아쉬움에 눈물도 났다. 한동안은 여파도 컸다. 골든디스크를 방송하던 시간만 되면 기분이 이상해졌다.

돈 안 되는 공연을 하는 기획자

이씨는 대구에서 돈이 안 되는 공연을 하는 공연기획자로도 유명하다. 그는 1987년부터 공연기획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라디오를 듣는 팬들과의 만남이 목적이었다. 디제이와 팬들의 만남에서 음악이 빠질 수 없다고 생각해 음악 공연이 곁들어진 팬미팅을 진행했다. 그렇게 팬미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대구는 공연 문화가 변변찮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특히 지역의 청년 음악가들은 설 무대가 없었다.

“대구에서 열리는 공연이면 당연히 대구 가수들도 설 자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본격적으로 공연기획자의 길에 들어섰다. 공연 기획을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었지만. 라디오 디제이에게 기획은 일상과도 같은 일이었다. 무대 기획부터 진행, 마무리까지 혼자 다 했다. 걸어 다니는 1인 기업이었다. 이씨는 공연으로 돈을 벌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씨만의 철학이었다. 좋아서 하는 공연기획이 돈벌이가 되면 업이 된다고 생각했다. 이씨가 기획한 공연들은 2만 원을 넘기지 않았다는 원칙을 정했다. 처음 공연일을 시작할 때는 250석 규모였던 공연이 30여 년이 지난 지금은 1800석 규모로 커졌다. 변하지 않는 것은 입장료가 2만 원이라는 사실이다.

1997년 IMF가 터지면서 우리나라의 분위기가 침체됐다. 공연계에도 우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런 때일수록 공연을 열어서 분위기를 환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죠.”

공연계에 활기를 불어넣고 싶어서 한 달 월급을 공연기획에 투입했다. 공연하는 동안은 다들 우울함을 떨치고 즐거워했다. 공연이 끝나면 가수와 스태프 모두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조촐하게 먹더라도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에 의의를 뒀다. 단 한 사람도 뒤풀이에 빠지지 않았다.

공연기획을 하며 많은 가수를 만나봤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가수는 김광석씨다. 그가 기억하는 가수 김광석은 말수도 적고, 숫기도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무대에서 노래할 때만큼은 매력적인 가수였다. 시를 읊조리듯 노래하는 그의 모습은 관객들의 마음을 잔잔히 적셨다. 공연 기획자이자 팬으로서 그를 무척 아꼈다.

그의 죽음을 알리는 연락을 받고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얼마 전까지 함께 술을 마시던 사람이 더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기 어려웠다. 이씨는 그 후부터 김광석과 관련된 일이라면 누구보다 앞장서 일하고 있다. 매년 추모공연을 여는 것은 물론이고 김광석 거리 살리기에도 힘썼다. 벽화밖에 없었던 거리에 공연장이 생긴 것도 그의 노력이 일조한 덕이다.

“벽화만 있던 자리에 가수들을 불러 버스킹을 부탁하고 제가 사회를 봤어요. 공연장이 생길 때까지 3년간 무보수로 노래를 불러준 친구도 있었죠. 그만큼 광석이가 가수로서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기억되길 바랐어요.”

트바로티 김호중에게 첫 단독콘서트 열어주다

트바로티(트로트+파바로티) 김호중과 인연도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다. 그의 생애 첫 콘서트를 주최한 이가 이씨였다. 이씨는 김호중씨의 고등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인 김종탁 선생과 선후배 사이였다. 하루는 TV를 보고 있는데 ‘스타킹’에 고등학생이던 김호중씨가 나왔다. 그의 사연과 노래를 듣고, 무대에 세우고 싶어졌다. 곧바로 김 선생님께 연락해 김씨를 소개해 달라고 말했다. 그렇게 ‘비쓸락’(비슬산의 쓸쓸한 사람들의 모임) 무대에 그를 세웠다. 공연이 끝난 뒤 김씨에게는 금일봉을 건넸다. 당시 기준으로 많은 금액이었다.

“호중이에게 준 돈은 출연료가 아닌 장려금이었어요. 장래가 촉망되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꿈을 응원하는 마음이었죠.”

이 만남을 시작으로 10년 동안 함께 일했다. 1년에 6~10회 정도 함께 공연했다. 치맥페스티벌, 포크페스티벌, 들안길 축제, 수성못 페스티벌, 김광석 거리 축제, 이대희의 OST 음악회 등 대구 무대에 김호중씨를 세웠다. 비쓸락 13주년 기념 음악회에서 김호중씨와 ‘향수’를 함께 부르기도 했다. 두 사람은 부자(父子)처럼 지냈다. 어느 날은 김호중씨가 조심스럽게 부탁을 해왔다.

“독일로 가기 전에 단독공연을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단독공연은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어야 할 수 있었다. 고민 끝에 단독공연을 열어주기로 결심했다. 무엇보다도 아들 같은 녀석의 첫 공연을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주고 싶었다. 객석을 채우기 위해 유명한 게스트를 불렀다.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객석도 꽉 찼고, 호응도 생각 이상이었다. 또 공연을 계기로 ‘비쓸락’이라는 음악회의 고정 팬도 늘었다.

후에 김호중씨가 미스터트롯에 출연한다고 알려왔다. 소식을 듣고 덤덤하게 “그래, 어디까지 올라가야겠다는 생각보단 최선을 다하고 와”라고 말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걱정스러운 마음이 컸다. 성악가가 트로트 프로그램에 나온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을까 우려됐고,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면 상처받을 것 같았다. 걱정과 달리 씩씩하고 밝게 방송에 임하는 김호중씨를 보며 대견스러웠다.

이씨는 메이퀸(본명 김소진), 일 포스티노(IL POSTINO), 조유마 등의 청년 가수들의 무대도 만들어줬다. 재능은 있지만, 환경 때문에 재능이 묻힐 뻔한 가수들이었다. 메이퀸의 경우 가정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까지밖에 다니지 못했다. 환경이 재능을 따라주지 못한 것이다. 제대로 배우고 다듬으면 누구보다 실력이 뛰어난 가수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이씨는 계명문화대학교 학부장에게 연락해 메이퀸을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이씨의 도움으로 메이퀸은 특별 장학생으로 입학해 무사히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메이퀸이 대학을 졸업할 수 있도록 도운 것은 지금까지도 가장 잘한 일이라고 여기고 있다.

젊은 인재들이 무대에 올라 공연하는 모습을 볼 때면 가슴이 벅차고 뿌듯함이 크다. 그와 함께 가수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소중하다. 한편으로 더 많이 도와주지 못해 미안한 가수들도 많다.

“대부라는 말은 저에게 과분합니다. 그저 음악을 사랑하는 ‘이대희’라는 인간이죠.”

2020년은 이씨에게도 힘들었던 해였다. 골든디스크가 막을 내렸고, 코로나19로 공연도 열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씨는 자신만의 길을 걸어 나가고 있다. 대구 MBC 유일 디제이로서 ‘이대희의 가요앨범’를 진행하고 있으며, 코로나 종식 이후의 공연도 기획하고 있다. 그의 인생은 계속된다.

“디제이는 제가 원해서 시작했지만, 사회자나 공연기획자는 어찌 보면 다른 이들이 원해서 시작한 일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고, 또 내 힘으로 주변을 도울 수 있으니 행복의 요건을 다 갖춘 셈입니다. 앞으로도 좋은 후배들과 즐겁게 일하면서 우리 지역의 문화 발전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김채은·홍지혜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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