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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전국기능경기대회 금메달 비결은 ‘금메달 최면 걸기’였죠”
김채은 객원기자  a@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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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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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홍식 달구벌명인이 이용실에서 고객의 머리를 다듬고 있다. 권 명인은 중학교를 졸업한 뒤 이용업에 뛰어들어 이용업계에서 최고 명인의 반열에 올랐다. 김광원 기자

 

“절대 지기 싫었죠.”

인자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평생 ‘순둥이’ 소리를 들으며 살았을 것 같지만, 그를 아는 사람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한다. “승부사”라고. 권홍식(66) 달구벌 명인에 대한 이야기다.

“뭘 해도 남보다 잘해야지 하는 생각이 강했어요. 목표가 정해지면 모든 걸 다 잊고 거기에만 파고들었죠.”

피가 철철 흐르는데도 “나는 괜찮다”

그는 중학교(의성 중학교)를 졸업한 후 이용업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고향 의성 면소재지에 있는 작은 이용소로 들어갔다. 그러나 무대가 너무 좁았다. 막 열여덟 살이 되었을 즈음 대구에 있는 이용소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부터 그의 승부사 기질이 본격적으로 발동했다.

낮에는 막내로 잔심부름을 하다가 8시에 셔터가 내려가면 그때부터 진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고향 친구들을 가게로 불러서 무료로 머리를 깎아줬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서툴기도 했지만 친구들은 “괜찮다”면서 의리로 버텨줬다. 가위로 귀를 잘라서 피가 흐를 때도 있었다. 그래도 친구들은 별다른 이야기 없이 “공짜로 깎아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친구자 은인들이었죠. 쥐 파먹은 머리가 될 수도 있는데, 고향 친구를 돕는다는 생각 하나로 저에게 머리를 맡겨줬으니까요. 그 친구들 덕분에 실력이 일취월장할 수 있었어요.”

그렇게 3년 만에 권 명인은 7명의 직원을 대표하는 이용사이자 가게의 얼굴이 되었다. 그 시절 권 명인의 마음 속에 늘 맴돌았던 생각은 “다리가 불편해서 잘 못한다는 말은 절대로 안 듣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다섯 살 무렵 어린 시절 침을 잘못 맞아 다리에 장애가 생겼다. 이후 2급 소아마비 장애 판정을 받았다.

가위로 농사짓던 그 시절

“고향에 와서 이용소 하나 차려라.”

대구에서 실력 좋은 이용사로 소문이 날 무렵, 부모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고향에 내려와서 이용소를 열라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고향 읍내에는 이용소가 없었다.

1974년, 고향에 돌아가니 처음엔 마음이 편하고 좋았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곤란한 상황을 맞닥뜨렸다. 우선 돈이 안 들어왔다. 시골 사람들이라 나락과 보리를 이용비로 냈다. 그것도 수확철이 되어야 받을 수 있었다. 마당에 그득하게 쌓인 나락과 보리를 보고 사람들은 그에게 “가위로 농사 짓는다”고 농담조로 말했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고향에 남아있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오빠 같은 이용 기술자 덕분에 의성 사람들 신수가 훤해졌다고 칭찬이 자자해요.”

고향에서 딱 하나 좋았던 게 있다면, 종종 이용소에 들렀던 친구의 동생이었다. 처음에는 오빠와 함께 커트를 하러 왔다가 나중에는 장날이나 볼일 있을 때마다 이용소에 와서 담소를 나누다가 돌아갔다. 그렇게 어느덧 연인에서 부부의 연으로 이어졌다. 아이가 태어난 후 아내가 말했다.

“돈 대신 곡식을 받아서는 먹고 살기 너무 힘듭니다. 대구로 갑시다.”

짐은 이불 보퉁이 하나가 전부였다. 동시에 전재산이었다. 100만 원의 빚을 내서 이용소를 열었다. 1979년에 평균 임금이 30만원 남짓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빌린 돈은 순식간에 갚았다. 100일 만에 환불을 완료했다. 이용소는 대성황이었다. 이용소 문을 열면 손님이 쉴 새 없이 왔다. 손님 수만큼 돈도 비례해서 모였다.

용기를 얻어 이용소 확장을 감행했다. 최신 기구를 들여놓고, 고급화를 추구했다. 그러나 불과 몇 달도 안 돼서 섣부른 도전이었다는 게 드러났다. 너무 시대를 앞서갔다.

“요즘에는 젊은 세대 사이에서 고급 바버샵이 유행하면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있지만, 당시로는 ‘비싼 이용소’에 불과했습니다. 문턱을 넘기 어려운 이용소로 소문이 나면서 파리만 날렸습니다.”

빚만 떠안고 실패했다. 고심 끝에 친구에게 찾아가 돈을 100만 원을 빌려달라고 했다. 매일 하루 수익의 절반을 친구에게 주는 방식으로 채무를 갚기로 하고 돈을 빌렸다.

벼랑 끝에 선 기분으로 일에만 파고 들었다. 진심이 통했다. 다시 손님이 미어터졌다. 나중에는 권 명인의 이용소 자리를 탐내는 사람도 많았다. 100만원을 빌려 개업한 가게를 권리금 600만원을 받고 넘겼다. 그 후 성당동에 정착해 30년 동안 이용소를 운영하고 있다.

목포에서 ‘금’ 자만 찾아다닌 이유

“검은색 차는 안 된다! 다른 차 찾아봐라.”

권 명인의 승부사 기질이 제대로 발휘된 때는 수제자 신춘호씨와 함께 2002년 전국기능경기대회에 참여해서였다. 금메달을 꼭 따고 싶었다. 2000년 같은 대회에서 권 명인은 은메달을 따냈다. 세계대회 참가자에게 무조건 금메달을 안긴다는 규정 때문에 나이에 걸려 아쉽게 은메달에 머물렀다. 당시 연습을 위해 사용된 마네킹만 3,000개를 썼다. 대회를 앞두고 본인과 제자에게 최면을 걸었다. 대회장인 목포로 향할 때 금색에 가까운 황색 차를 구해서 타고 갔다.

“저 모텔도 좋은데 왜 자꾸 다른 데, 다른 데 하십니까?”

목포에 도착해서는 몇 시간이나 시내를 돌면서 묵을 모텔을 찾았다. 숙소를 왜 그렇게 까다롭게 고르냐는 신씨의 물음에 권 명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금’ 자가 들어간 숙소를 찾고 있다.”

실제로 금(金)자가 들어간 모텔을 찾아서 체크인을 했다.

“마담요, 이 아가씨 말고 저 아가씨한테 커피 좀 가져다 주라고 해주세요.”

짐을 풀고 커피 한잔을 하러 다방에 들렀을 때다 커피를 가져오는 아가씨를 골랐다. 신씨가 커피를 들고 오는 아가씨를 보고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아가씨는 머리를 금발로 염색하고 있었다.

“금 기운을 쫙쫙 모아야 금메달을 딸 가능성이 높아지는 거야.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운이 안 따르면 말짱 도로묵이다.”

처음에는 금메달 타령에 미심쩍은 눈빛이던 신씨도 이 즈음해서는 수긍하는 눈치였다. 권 명인의 최면에 걸린 셈이었다. 최면이 최고의 효과를 발휘한 것은 사흘 동안 열린 대회 중 첫째 날 밤이었다.

“빨리 일어나라.”

하루 종일 대회를 치르고 코를 기리며 자고 있는 신씨를 흔들어 깨웠다. 신씨는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섰다. 불게 충혈된 눈으로 “왜 그러십니까?” 하는 제자에게 권 명인은 아이롱을 쥐어주었다.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승부가 아이롱 파마에서 날 것 같다. 조금만 연습 더 하자.”

“예, 선생님!”

밤늦도록 아이롱 파마를 연습했다. 흡족할 만큼의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계속 연습했다. 권 명장은 마음에 쏙 드는 작품을 뽑고서야 “이제 됐다. 좀 자두자”고 했다. 밤 10시에 시작한 연습은 새벽 2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스승의 오케이 사인에 신씨는 편안한 얼굴로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권 명인의 예상은 적중했다. 고만고만하던 성적이 아이롱 파마에서 갈라지기 시작했다. 신씨는 누구보다 완벽한 아이롱 파마를 선보였다. 승부처에서 훌륭한 결과물을 낸 결과 금메달을 거머쥘 수 있었다.

신씨는 “그땐 무언가에 최면이 걸렸던 것 같다”면서 “스승님의 혹독한 훈련과 집념 덕분에 금메달을 땄고, 그 금메달이 제 인생의 변환점이 되었다”며 고마워했다.

신씨는 지금도 권 명인과 돈독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그는 현재 대구한의대학교 평생교육원 외래교수, (사)한국이용사회중앙회 기술강사, (사)한국전통문화연구진흥원 총회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용계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어

권 명인은 현재 이용 부문 1호 달구벌 명인이다. 달구벌 명인에 등극하기까지 2차례나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때도 ‘승부사’ 기질이 발휘됐다.

“포기할 수 없었어요. 이용 부문에서 명인이 나오면 이용업계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이용계 대선배로서의 치적이 적지 않다. 경험에 의존해서 머리를 다듬던 관습을 벗어나 과학적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이론을 다수 정립했다. 이 이론을 들고 2010년부터 3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이용사들에게 특강을 실시한 것은 물론 지금도 무궁화직업전문학교 학생들을 꾸준히 가르치고 있다.

“지기 싫어서 아등바등 실력을 닦고 열심히 살아왔는데, 이제는 베풀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가 지금껏 배우고 익힌 것들, 소중한 경험 모두 후배들에게 잘 물려주고 싶습니다. 얼마나 잘 가르치고 또 얼마나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이 제 이용 인생의 마지막 화두입니다.”

김채은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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