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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너무 애쓰지 않고 너무 바쁘지 않은 곳

  • 입력 2021.01.08 00:00
  • 기자명 이진숙 전 '클럽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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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시골에 살았다. 깨끗한 공기 덕분에 머리는 맑았고, 넉넉한 자연 덕분에 마음은 편안했다. 조용하고 한가로웠으므로 감각은 깨어났고 생각은 유연했다. 불편함과 부족함은 여유로 다가왔고, 뒤로 처졌다는 불안감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소외감은 평화로 느껴졌다. 너무 애쓰지 않고 너무 바쁘지 않은 곳이라서 행복했다. 힘들게 얻은 것만이 아니라, 가만히 곁에 있는 것을 누릴 줄 아는 것도 성공이었다. 이렇게 살아도 될 것 같았다.

사람이 한가득 살고 있는 도시의 아파트에는 사람 사는 소리가 없다. 소통이 되어야 할 사람 사는 소리가 조금만 커져도 곧바로 층간소음이 된다. 사람들은 성공을 쫒아 부랴부랴 뛰고 행복을 찾아 뱅뱅 도느라 꿈꾸고 있을 시간이 없다. 가진 것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그저 소유한 채 돌이킬 수 없는 삶을 그냥 날려 보내고 있다. 도시에서는 얻은 것보다 놓친 것이 크다. 도시는 떠나도 그립지 않던데 시골은 그리웠다.

끊임없이 시골에 가까워지고 싶었다. 결국 시골에 작은 공간을 마련했다. 수리를 하면서 소음 걱정을 했더니, “시골 사람들은 다 이해한다. 사람이 사는데 소리가 나지”라 하고, “내가 지금 고시 공부하는 것도 아닌데, 뭘”라고 한다. 바로 곁에 사는 할머니가 “수리한다면서 언제 하느냐?”고 묻는데, 안심이 되면서 “푸흡”하고 웃음이 터졌다. 시골에는 마음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살고, 귀가 어둡고 귀여운 할머니가 산다.

감이 주렁주렁 열린 마을에는 감을 바구니에 가득 담아주고, “마당에 와서 열무 뽑아가라”고 말한다. 비좁은 방의 바닥을 손으로 탁탁 두드리며 “여기 뜨시다. 어서 들어온나”라고도 한다. 손수 만든 식혜를 선뜻 내어오고, 마당에서 대추를 한 아름 따서 주고, 나이를 묻더니만 “친구하자”고도 한다. 도시에서는 들을 수 없는 ‘언어’가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시골에는 대문을 열어놓고 살면서 마음도 열어놓고 사나보다.

이런 작고 소박한 일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쌓인 것이 시골의 풍경이다. 이런 대수롭지 않은 일 하나하나가 일상의 진국이다. 차를 몰고 지나가는 사람은 이런 일들을 절대 알 수 없고, 아파트 유리창 안에 사는 사람은 이런 것들을 결코 느낄 수 없다. 시골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나는 향기가 있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무언가가 있다.

도시에서 걷는 것보다 시골길을 걷는 것이 훨씬 더 상쾌하다. 날아다니는 새를 보기만 해도 절로 미소가 나온다. 햇볕은 그저 기분을 환하게 할뿐만 아니라, 이불까지 뽀송뽀송하게 만들어 깊게 잠들게 한다. 티끌만 한 행복을 소중히 여기게 하고, 그저 지금을 즐기라고 한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걱정이 사라지고, 구름을 바라보면 마음이 가벼워진다. 비가 그친 후에는 ‘산 할아버지의 구름 모자’도 볼 수 있다. 가져가는 사람은 임자가 되고, 많이 바라보는 사람은 부자가 되는 하늘이 주는 선물이다. 시골에는 이런 선물이 날마다 찾아온다.

도시에서는 원하는 물건이 많아지고, 시골에서는 원하는 시간이 많아진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걷는다. 혼자 있으면서도 혼자가 아닌 느낌이 묘하게 편안하다. 길고 풍성해진 나만의 시간에 나 자신에게 정성을 들인다. 차를 끓이고, 음식을 만들고, 친구를 맞이한다.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과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줄 시간이 넉넉하다. 나는 아무리 바빠도 이런 것들을 놓치고 싶지 않다. 내가 하고 싶은 이런 일들은 시골과 어울린다.

소박한 것과는 멀어져버린 삶이 안타깝다. 꽃의 향기를 맡지도 않고, 별을 바라보지도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며 살고 있다. 살맛 나는 세상과 사람 사는 맛을 잃어버린 채, 그런 줄도 모르고 살고 있다. 시골에 가는 것은 나 자신에게 기회를 주는 일이다. 소중한 것들을 알아보고, 살아 있는 기분을 느끼고, 삶을 살찌우고 싶다. 지금을 만끽하며 내가 몰랐던 기쁨을 느끼고 싶다. 시골은 삶의 아름다운 구석구석을 살펴보기에 좋다. 뭔가 굉장히 좋은 예감이 든다.

이진숙 전 '클럽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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