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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은 전문가가 시는 그대로 실행 진정성·역할 분담 ‘시너지’

‘순천만의 성공’에서 배울 것

  • 입력 2020.11.07 00:00
  • 수정 2020.12.02 13:49
  • 기자명 김윤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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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이 읍에 처음 와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기형도의 등단작 ‘안개’ 첫머리다. 김승옥의 단편소설 ‘무진기행’은 이렇게 시작한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장르가 다른 두 작품의 서두가 닮았다. 운을 띄우듯 서로 조응한다. 안개나 안개 나루(무진)에 대한 묘사가 그대로 한 작품 같다. 아득하고 불투명한 운명의 느낌 물씬한 행간 어디쯤에서 안개가 피어오를 것 같다.

순천만 가는 길의 연상

‘안개’를 읽으면 ‘무진기행’이 떠오르고 ‘무진기행’을 읽으면 ‘안개’가 떠올랐다. 나중에는 ‘이 읍’이 ‘무진’이고 ‘무진’이 ‘이 읍’이 됐다. 이상한 혼동은 부실한 기억력 탓만은 아니다. 안개라는 같은 소재가 불러일으키는 연상효과다.

기형도는 연평도(옹진군 연평리)에서 태어났다. 네 살 때 안양천변 시흥군 소하리(지금의 광명시 소하동 701-6)로 가족이 이사해 청년 시절까지 살았다. 김승옥은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해방을 맞은 네 살 때 대대포구(순천만) 상류 순천시 금곡동154번지로 가족과 함께 귀국해 유년기를 보냈다.

안양천과 순천만은 시인과 작가의 어린 시절을 가까이서 흐르며 지켜보았을 것이다. 강과 만에 대한 기억은 위 두 작품의 실제 배경이 됐다. 배경은 800리나 서로 떨어져 있는데 분위기는 지척이다. 안개가 불러낸 착시다. ‘안개’를 읽고부터 ‘무진’이나 순천만에 김승옥 대신 기형도가 나타났다.

‘무진기행’의 배경은 작가가 어린 시절을 보낸 순천만이다. 순천만 습지와 갈대밭, 철새 무리가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이나 성찰, 새 출발의 장소가 된 사연 중 하나에는 ‘무진’이 있을 것이다. 광활한 습지의 풍경이 만들어내는 장소성은 한 시대를 풍미한 문학 작품의 배경으로 등장하면서 더욱 풍부해졌다. 순천만 가는 길에 떠오른 생각이다.

민간 생태계 조사로 순천만 가치 발견

순천만을 다시 찾았다. 6개월 동안 2013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가 열렸던 장소는 제1호 국가정원 ‘순천만국가정원’이라는 새 이름을 달았다. 이곳은 흔히 대규모 행사 후행사장이 방치되거나 애물단지가 되고 마는 통례를 깼다. 처음부터 상시 개장의 용도에 맞도록 건물을 지었고 조경공사를 했다. 일회용 시설은 실내정원 한 동뿐이었다.행사 후 이 임시시설만 철거하고 6개월 만에 항구 개장했다(2014년 4월). 단순 재개장이 아니었다. 5개월 후 제1호 국가정원으로 지정되면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생태 정원이 됐다. (제2호 국가정원은 울산 태화강국가정원이다.)

순천만을 보전하기 위해 국제정원박람회를 열고 이곳이 순천만국가정원으로 격을 갖춘 진행 과정이 궁금했다. 시민의 관심과 참여, 민관의 협력 없이 생태 관광 도시는 태어날 수 없을 것이다. 순천만과 주변의 변화 과정을 간단히 정리했다.

1990년대 초만 해도 순천만은 여기저기 쓰레기가 쌓여 있는 여느 해안과 다르지 않았다. 보호나 관리 체계가 작동하지 않는 소극적 방치였다. 1996년 11월 지역의 한 환경단체가 순천시의 동천 하류 하도정비사업이 실제로는 하천 골재 채취에 불과하다고 반발하면서 처음으로 순천만 생태계 조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순천만의 생태적 가치를 발견하게 됐고 이를 계기로 순천만 보전운동이 시작됐다. 이러한 시민적 관심과 노력이 오늘의 순천만습지를 있게 한 바탕이었다.

생태공원 개장 이후 방문객 급증

습지와 갈대밭, 철새들의 군무가 만드는 순천만의 풍경은 이미 관광 명소로 많이 알려져 있었다. 이에 맞춰 2004년 11월 순천만자연생태공원이 개장하면서 방문객은 급증했다. 관광객이 몰려들고 주변 개발 행위가 계속되면서 습지 훼손 우려가 제기됐다. 2011년부터 순천만자연생태공원 조성사업이 적잖은 성과를 거뒀으나 습지 훼손우려는 더욱 커졌다.

강하구를 막아 간척을 하면서 갈대밭은 줄어들고 칠면초 등 염생 식물은 멸종 위기에 몰렸다. 농경지에는 하우스나 산업시설이 들어서면서 흑두루미, 기러기 등 철새들은 일본이나 다른 곳으로 갔다. 관광지 개발 명목으로 경관 좋은 곳에는 펜션, 식당 등이 들어섰다.

개발이냐 보전이냐는 갈림길에서 순천시민과 시는 더 강력한 보전을 택했다. 순천만부터 살려야 했다. 순천만자연생태공원 사업은 다양하게 이뤄졌다.

우선 습지 주변 약 1,000ha(300만 평)의 농경지를 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했다. 갯벌 탐사선을 시에서 직접 운영해 운항 속도를 7노트 이하로 낮췄다. 탐사선이 빠르게 달릴수록 큰 너울이 생겨 갯벌을 훼손했기 때문이다. 방문객에게 갯벌을 설명하는 소리에 철새가 놀라지 않도록 핸드 마이크 대신 이어폰을 이용했다. 포구 주변 식당 7곳도 설득 끝에 밖으로 이전했다.

개발 대신 더 강력한 보전 택한 시민들

특히 철새가 먹이를 먹는 농경지에 전봇대가 282개나 서 있어 모두 철거했다. 전선이 뭔지 모르는 철새들이 날다가 걸려 다리가 부러지는 등 사고가 잦았다. 사람 아닌 철새를 위해 전봇대를 철거한 우리나라 첫 사례였다.

농경지 약 59ha(18만 평)에 대해서는 친환경농법을 의무화해 제초제 등 농약을 쓰지 않도록 했다. 지렁이나 벌레가 잘 자라야 새들도 잘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 농민들은 한해 농사를 철새와 온갖 벌레들과 나눠먹는 셈이다. 철새 철인 10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는 농경지 주변 도로변에 갈대울타리를 설치했다. 철새들의 잠자리를 방해하지 않도록 야간 차량 불빛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낮에는 철새들이 안심하고 먹이를 먹거나 놀 수 있도록 사람들의 통행을 막았다.

민관이 힘을 합친 이러한 노력으로 순천만의 생태는 더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났다. 자연이 살아있는 천혜의 경관은 소유와 투자의 대상이 된다. 순천만 습지를 지키기 위해서는 해안과 주변에 대한 개발 행위를 막아내야 하는 더 큰 과제가 남았다.

순천만과 순천 도심은 불과 6km 거리. 도심 개발은 순천만 쪽으로 빠르게 잠식해왔고 습지 훼손은 시간 문제였다. 이에 순천시는 도심과 순천만 사이 112만㎡(34만평, 축구장 157개 넓이)에 ‘에코벨트’ 개념의 생태 보호 구역을 조성하기로 했다. 순천만을 향한 도심 개발의 진행을 차단하는 방어막이자 수용 규모를 넘어선 순천만 습지관광객을 분산할 대체재로서 완충 지대였다.

개발 차단, 관광객 분산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야심찬 생태 프로젝트는 당연히 예산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대규모 생태 복합 시설의 조성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정부 지원이 필수였다. 하지만 정원 조성은 정부 지원 대상 항목이 아니었다. 여기에서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 개최라는 방안이 제시됐다. 여러 논의 끝에 정부예산 과목에 맞춰 국제행사인 2013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를 유치하기로 한 것이다. 처음부터 행사를 위해 행사를 기획한 것이 아니라 순천만의 생태적 보전 방안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나온 안이었다.

 

 

지난해 입장객 618만 명 국내 최고 기록

2013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는 성공적으로 끝났다.(입장객 440만 명, 수익 514억원, 유료 입장률 89%, 흑자 164억 원) 지난해 순천만국가정원과 순천만습지 입장객은 618만 명이었다. 이는 전국민의 12%에 해당하는 엄청난 숫자다. 상업용 놀이시설을 제외한 단일 관광지로는 전국 최다 기록이었다. 교부세 인센티브를 제외한 입장료 수입만 어림잡아 172억 원. 제주시와 서귀포시의 연간 입장료 수입을 합친 규모이고 안동이나 경주의 5~7배에 달한다. 음식료, 숙박료 등 간접 수입은 연 2,000억 원을 넘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성과는 습지 보전과 지속 가능한 이용이라는 명확한 생태적 목표 아래 아이디어와 기획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시와 공무원은 이를 그대로 실행하는 역할 분담과 공적 자세의 진정성이 일으킨 시너지다.

순천시의 성공 사례를 벤치마킹한 포항시와 제주도, 서산시·태안군 등도 국가정원조성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순천시는 2023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를 준비 중이다. 순천만의 진정한 주인은 사람만이 아니다. 귀한 이웃인 흑두루미 등 철새와 갈대, 염생식물을 아끼고 지킨 순천시민들의 선택은 두고두고 축복 받을 일이다.

최덕림 당시 순천만정원박람회 조성본부장은 이렇게 말했다. “가장 좋지 않은 것이‘어정쩡한 것’이다. 어정쩡한 것은 아예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하지 않았으면 예산낭비라도 막는다. 그래서 기획이 중요하다. 기획한 것은 어떠한 난관이 있더라도 계획대로 완성해야 한다. 순천만은 전문가가 기획하고 공무원은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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