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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뮬리

시여세 칼럼 시민기자가 여는 세상

  • 입력 2020.11.02 00:00
  • 기자명 김윤곤 <대구한국일보시민기자대학 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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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은 계절상 봄철에 잠깐 볼 수 있는 색이다. 그것도 복사꽃이나 진달래 막 필 무렵에 선연했다가 점차 옅어진다. 그렇게 잘 잊히는 ‘아쉬운 빛깔’이다. 더욱이 가을에는 매우 보기 드문 색이다.

이 귀한 분홍이 요즘 지천이다. 핑크뮬리(Pink muhly)가 전국 곳곳에 만발했다. 핑크뮬리는 가을꽃이다. ‘분홍억새’, ‘분홍쥐꼬리새’라는 우리말 이름이 더 정겹고 입에 붙지만 ‘핑크뮬리’라는 이름이 이미 널리 퍼졌다. 국가표준식물목록에는 추천명을 ‘털쥐꼬리새’로 올려놓았다.

화려하고 이국적인 아름다움

높아진 가을빛 하늘 아래 핑크뮬리는 화려하고 이국적인 정취로 넘실거린다. 이를 배경으로 인생샷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는 뉴스가 잇따른다. 지난 2014년 제주도의 한 생태공원에서 처음으로 심어 일반에 공개한 것으로 알려진 핑크뮬리는 이후 빠른 속도로 퍼졌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427종의 외래식물 중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전국에 퍼졌다. 여러 지자체들도 앞다퉈 심었다. 전국의 핑크뮬리 식재면적은 최소 10만422㎡, 축구장 14개 규모다.

지난해 12월 국립생태원은 핑크뮬리를 생태계 위해성 2급으로 지정했다. 현재는 위해성이 보통이지만 향후 위해가 나타날 우려가 커 지속적 관찰이 필요한 경우다. 좀 더 지켜보아야 하겠지만 번식력과 생존력이 강해 보통의 제초제로는 방제할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일부 지자체에서는 애써 심어놓은 핑크뮬리를 벌써 갈아엎고 있다.

마음에 드는 식물을 마음대로 심고 즐길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다른 식물에 위해를 끼칠 수 있다는 주의사항이 붙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소규모로 심어 잘 관리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관리가 잘되지 않거나 심은 후 방치할 경우 얘기가 달라진다.

문화재 주변에도 핑크뮬리

특히 일부 지자체가 생태적 위해성 여부나 지역적 특성, 주변 경관에 대한 고려 없이 이를 대량 식재한 것은 성급했다는 지적을 면할 수 없다. 유서 깊은 문화재 주변이나 공원, 거리 등 곳곳에 온통 심어놓은 신품종의 이국종 핑크뮬리를 바라보는 심정은 착잡하다.

SNS에 사진을 올리면서 서로 소통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은 현대인들의 보편적 일상이다. ‘남는 것은 사진뿐이다’ 또는 ‘나는 찍는다. 고로 존재한다’가 현대인의 존재 방식이 됐다. 사진을 찍느라 더욱 바빠진 현대인에게 모든 장소는 내가 폰으로 찍는 사진의 배경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렵다. 의미나 맥락은 중요하지 않다. 사진을 찍어야 직성이 풀리고 한번 찍고는 돌아보지 않는다. 장소를 끊임없이 소비·소모하는 방식이다.

마르크 오제(Marc Augé)를 비롯한 일군의 인류학자들은 현대인들이 빈번히 지나되 역사적 의미나 상징성없이 단지 이동과 통행만을 위한 공간을 비-장소(non-place)라고 정의했다. 비장소에서는 친밀감과 유대감을 느낄 수 없다. 비장소에 오래 머물수록 소외감과 무기력, 우울감을 느낀다. 역과 대합실, 도로와 거리 등이 해당한다. 여기에는 SNS에 사진을 찍어 올리고는 다시 돌아보지 않는 장소도 포함될 것이다.

장소를 비장소로 만드는 천편일률

핑크뮬리의 환상적인 색감과 부드러운 질감,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과는 무관하게 상당수의 장소마다 핑크뮬리가 심어져 있는 풍경은 놀랍다. 천편일률은 소중한 장소를 비장소로 만든다. 우선에 사람들이 몰린다고, 인생샷이라며 좋아한다고 곳곳의 풍경을 똑같이 만든 결과가 어떠할지는 되물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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