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난초 도둑으로 몰렸지만 포기하지 않고 난초 공부 4년 만에 누명 벗어

나의 삶 나의 철학 이대건 대한민국 농업명장 1호 - 세 번째 이야기

  • 입력 2020.11.11 00:00
  • 수정 2020.12.02 09:52
  • 기자명 김광원기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한민국 농업명장 1호가 된 이후 난초를 배우겠다는 사람이 많았다. 제자 중에 경찰이 한명 있다. 그와 만난 시기가 재밌다. 내가 가장 어두웠던 시절에 만났다. 나는 조직폭력배의 일원으로 대구상업고등학교 건너편에 형성된 포장마차촌을 관리하고 있었고, 그는 해당 지역을 순찰하는 경찰이었다. 어느 날 그가 내게 물었다.

“계속 반건달로 살랍니까?”

우연히 나의 난초 지식을 알고 난 후 건넨 말이었다. 그 역시 난초에 관심이 많았다. 난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순찰도는 경찰이 어떻게 난초에 관심을 가지게 됐을까’ 생각했고, 그는 ‘건달이 난초를 어떻게 이 정도로 많이 알지’ 하고 깜짝 놀랐던 거였다. 서로 은근히 무시하다가 난초 때문에 절친이 되었다. 그는 몇 번의 권유 끝에 못을 박듯이 말했다.

“다른 거 다 때려치우고 난초를 하십시오.”

시일이 걸리긴 했으나, 나는 그의 충고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제자가 스승을 성장시켰고, 그런 후에 성장한 스승에게 난초의 진수를 전수받은 셈이었다. 기이하고 재밌는 인연이다.

“이 사람아, 난 공부 좀 하게!”

1989년, 나는 달서구 진천동에 꽃집을 열었다. 친구가 운영하던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차린 꽃집이었기에 애착이 많았다. 하우스 한켠에 군용침대를 놓고 꽃집에서 숙식을 해결했고, 부업으로 여름에는 냉차를, 겨울에는 고구마를 팔았다. 말 그대로 죽을 둥 살 둥 매달렸다.

열심히 살려고 애쓰는 모습이 측은했는지 응원해주는 분들도 많았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대구 칠성시장에서 마사토를 사서 오는데, 오르막길에서 오토바이가 멈춰버렸다. 시동이 꺼진 게 아니었다. 오르막길 앞에 있는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대기를 하고 있다가 파란불을 보고 시동을 걸었는데 아무리 힘을 줘도 나의 50cc애마는 엔진 타들어가는 소리만 낼 뿐 올라갈 생각을 않았다. 그때 뒤에 섰던 버스가 천천히 다가왔다. 버스의 앞 범퍼가 내 오토바이의 뒷꽁무니에 닿았다. 버스는 내 오토바이를 천천히 밀어올려줬다. 인도에 섰던 사람들이 와하하, 웃으면서 박수를 쳤다. 세상이 내게 건네는 응원처럼 느껴졌다.

나름 잘나가던 꽃집이었으나 2년 남짓 경영하다 접었다. 난초 때문이었다. 나는 꽃집을 연 뒤부터 난초 채집을 하러 다녔다. 물론, 혼자서는 불가능했다. 차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웃 꽃집들을 설득했다. 세 곳에서 호응했다. 그들과 함께 청도 등을 다니면서 난초를 캐러 다녔다. 한번은 ‘사피’를 캤다. -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피’는 이파리에 뱀껍질 같은 무늬가 생긴 난초를 이르는 용어다.

“여기 볼링장 화분에 심어놓은 꽃과 나무 모두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지역에서 제일 큰 볼링장이 이래도 되겠습니까.”

당시에 기업은행에 다니는 차장 한 명이 나의 고객이었다. 내가 채집해온 난초를 내밀자 그는 사피가 아니라고 했다. 영양실조로 사피처럼 보이는 것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캐느라 고생했으니 5만원 정도 쳐주겠다고 했다. 난초를 들고 밖으로 나가던 그가 한심하다는 투로 한마디를 던졌다.

“이 사람아 난초 공부 좀 하게. 난초 하겠다는 사람이 난을 그렇게 몰라서야 되겠나.”

화분으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군에서부터 난초를 공부했고 인근 꽃집들 사이에서는 “난초 하면 이대건”으로 통하는 나였다.

“형님요, 나는 난초 배우러 일본으로 밀항할랍니다.”

이웃 꽃집에서 가서 속내를 털어놨더니 혀를 끌끌 찼다. 밀항이 쉬운 게 아니라는 거였다. 그러면서 대구에서 가장 난을 잘하는 사람 두 명을 일러줬다. 그 두 사람 중의한 명이 나중에 ‘영남난원’을 차린 정정은 선생이었다.

스승을 만나기 위해 볼링장에 취직

나는 스승을 만나기 위해 볼링장으로 갔다. 워낙 은둔하다시피 하는 분이라 만나기도 힘들었고 제자를 키우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그러다 그분이 볼링 마니아라는 정보를 얻었다. 단골 볼링장에 취직을 하면 자연스럽게 친분을 쌓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볼링장에서 구인 공고를 냈다. 나는 즉시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보러 갔다. 면접장에 들어서는 순간 탈락을 직감했다.

며칠 전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지나가던 자가용과 접촉 사고가 날 뻔했다. 차에서 내린 운전자와 험한 말을 주고받으며 실랑이를 했는데, 그 차가 하필 볼링장 사장님의 자가용이었다. 운전대를 잡았던 부장이 면접장에 나타났던 것이었다. 며칠 전에 미간에 삼지창을 그려대면서 언성을 높인 지원자를 뽑아줄 리가 없었다. 면접이 끝난 후 빙글빙글 웃으면서 “수고했슴다” 하는 부장을 보면서 부아가 치밀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니가 여기 웬 일이냐?”

낙담해서 볼링장 앞에 앉아 있다가 우연히 우리동네 슈퍼 주인을 만났다. 그는 대구생활체육협의회 대구시볼링협회에서 대구시 상비군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내 이야기를 듣더니 “내가 김 전무 한번 만나볼게” 하고 말했다. 김 전무란 분이 결정권을 쥐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얼마 후에 볼링장에서 한번 와보라고 연락이 왔다. 김 전무란 분이 부른 것이었다. 나는 나만의 장점을 확실히 어필해야겠다 싶어 이렇게 말했다.

“여기 볼링장 화분에 심어놓은 꽃과 나무 모두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지역에서제일 큰 볼링장이 이래도 되겠습니까. 특히 전무님이 키우는 난초는 얼마 안 가 죽을 겁니다.”

김 전무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도 나름 난초애호가였던 것이었다.

“꽃 좀 아나?”

내가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이력서 다시 한번 보십시오.”

이력서를 들춰본 그는 “내일부터 출근하게”하고 대답했다. 기계실 입사에 성공했다. 스승을 만나기 위한 1차 관문을 통과한 것이었다.

출근한 날, 정 선생의 동선을 파악했다. 주로 언제 볼링장에 오는지 체크한 거였다.

선생이 오는 날에는 내가 미리 예약을 해뒀다. 당시는 볼링장 숫자가 많지 않아 2시간대기는 기본이었다. 내가 예약을 해둔 덕에 정 선생은 도착하자마자 바로 공을 굴렸다. 한달쯤 지났을 때, 정 선생에게 그간의 사연을 털어놓았다.

“형님한테 난초 배울려고 볼링장에 취직했습니다.”

선생은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볼링이나 열심히 해라. 그리고 난 난초 기술도 별로 없다.”

그러나 여섯 달 동안 내리 예약을 해주자 어느 날 내게 말했다.

“내가 난초집을 열까 고민인데, 열게 되면 와봐라.”

얼마 후 난초 가게를 열기로 마음먹고 나를 불렀다. 나는 선생의 가게로 나는 듯이 달려갔다. 가게 이름은 ‘영남난원’이었다.

 

 

개에게도 무시당했던 난초 수업 시절

제자로 들어가는 데는 성공이었지만 스승님은 나의 기대를 전혀 충족시키지 못했다. 여섯 달 동안 허드렛일에 청소만 했다.

“기술은 언제 가르쳐줍니까?”

볼멘 소리를 하면 선생은 퉁명스레 대꾸했다

“기술 잘 가르쳐 주고 있는데, 무슨 소리냐.”

제일 하기 싫었던 일은 개똥 치우기였다. 수돗가가 있는 뒷마당에 개가 한 마리 있었는데, 이놈이 인정이라곤 없었다. 순한 개는 며칠만 얼굴을 봐도 꼬리를 살랑거린다. 이놈은 볼 때마다 웬 놈이냐, 하는 표정이었다.

11월 말 즈음이었다. 한번은 대야에 돌(난석)을 잔뜩 담아 물에 씻으러 뒤뜰에 나갔다. 대야를 턱, 내려놓은 뒤 고무장갑을 끼고 막 돌을 씻으려는데 개와 눈이 마주쳤다.

‘이 한심한 인간아, 그렇게 할 일이 없나. 배우는 것도 없이 잔심부름이나 하면서. 인생이 불상타!’

나는 마당에 있던 돌을 집어서 개에게 집어던졌다. 그러자 개가 똥구멍에서부터 끌어올린 소리로 컹컹 짖어대기 시작했다. 정 선생이 무슨 일인가, 하는 얼굴로 마당으로 나왔다. 그는 대야 앞에 쪼그리고 앉은 나를 지긋이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힘들제?”

나는 아무 말 없이 불만이 그득한 눈빛으로 정 선생을 쳐다봤다.

“내일부터 안 나와도 된다. 지금까지 배운 것만 해도 많이 배웠다.”

그 말 한마디를 던지고는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개는 계속 짖어대고 있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나는 애꿎은 분풀이를 난석에다 했다. 평소 같으면 혹시 돌이 부서질까 솔로 살살 문지르다시피 닦았는데, 그날은 이놈의 돌들을 자갈로 만들어버리겠단 생각으로 밀가루 반죽을 치대듯이 박박 씻었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는데 선생이 마당으로 나왔다. 나는 속으로 ‘아이고,이 자슥이 와 이카노. 돌이 다 부스러졌네’ 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빙긋이 웃었다.

“인제 돌 좀 제대로 씻네.”

내가 멍하니 쳐다보자 한 마디 덧붙였다.

“돌은 원래 그렇게 씻어야 된다.”

나중에야 안 일이었지만 돌을 빠득빠득 문지르지 않으면 난초 줄기가 부패하기 일쑤다. 후사리움균 때문이다. 난초를 죽이는 가장 일반적인 병을 일으키는 균이다. 뾰족한 돌이 둥글해지도록 마모시켜야 균이 사라진다. 난초 키우기에서 제일 중요한 기술 중의 하나다. 선생이 다시 난실로 들어간 뒤 나는 허리를 꾸벅 숙였다.

“스승님, 감사합니다!”

난초 도둑으로 몰렸지만, 결국 다 배우고 “하산하라”

고비가 한번 더 있었다. 도난 사고가 발생했다. VIP 손님이 난원에 맡겨둔 700만원짜리 난이 사라져버렸다. 1994년에 700만원이면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CCTV도 없던 시절이라 서로 의심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날 난원을 다녀간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각자의 알리바이를 점검했다. 엉뚱하게 불똥이 나에게 튀겼다. 누군가 “아무래도 대건이가 의심스럽다”는 말을 꺼낸 것이었다. VIP 회원들이 정 선생을 찾아와 최후통첩을 던지듯 말했다.

“대건이가 계속 출근하면 난원에 발길 끊겠습니다.”

정 선생은 나를 인근 찻집으로 불러냈다. 나는 정면으로 물었다.

“형님도 제가 훔쳐갔다고 생각합니까?”그러나 정 선생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다들 너를 불편해하는 분위기다. 다들 니가 안 보여야 안심이 되겠단다.”

나는 찻집에서 대성통곡을 했다. 갑작스런 울음에 다들 당황했다. 사부가 내 어깨를 다독였다. 나는 한바탕 웃고 난 뒤에 빙긋이 웃었다.

“형님, 듣고 보니 나 말고는 도둑이 없겠네요. 내가 도둑놈 하겠습니다!”

잠시 뜸을 들인 뒤에 울면서 머릿속으로 떠올린 생각을 밝혔다.

“내일부터 손님으로 가겠습니다. 나도 난초 가게를 해봤고, 우리 동네에도 난을 살 사람이 있습니다.”

선생의 난을 받아 소매상을 하겠단 뜻이었다. 그는 입이 반쯤 벌어진 채 기가 찬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살다 살다 너 같이 지독한 놈 처음 봤다. 이런 상황에서 난원에 오고 싶나.”

그 말에 나는 이유를 분명히 밝혔다.

“형님, 저는 아직 난 기술 덜 배웠습니다.”

사족을 달자면 난을 훔친 사람은 4년 뒤에 밝혀졌다. 그도 난실에 자주 오갔던 사람인데 난초를 감상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난을 옷 속에 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집에 와있더라는 거였다. 나쁜 행동이긴 했지만 난의 매력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아주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손님으로 출입한 지 몇 달쯤 흘렀을 무렵이었다. 어느 날 정 선생이 나를 단란주점으로 불렀다. 마이크를 잡고 눈을 감은 채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란 팝송을 불렀다. 가사도 안 보고 부르는 모습에 놀랐다. 노래가 끝난 난 뒤에 보니 선생의 눈가가 촉촉했다.

“니가 이렇게 죽자 살자 매달리는데, 내가 더 이상 매정하게 못 하겠다.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기술 가르쳐줄게.”

선생은 분실 사건 이후 심경의 변화가 찾아왔다. 난실을 닫을 생각이었고, 나를 후계자로 점찍은 것이었다. 선생은 그 뒤 넉 달 정도를 집중적으로 가르친 후에 나를 불러서 이렇게 말했다.

“더 가르쳐 줄 게 없다. 너도 나가서 네 이름으로 난실을 차려라.”

선생은 덤으로 영주에서 대구까지 자신이 거래해오던 난가게를 모두 소개해줬다. “내가 아는 만큼 이 친구도 압니다. 믿고 거래하십시오”하는 소개와 함께.

1995년 봄, 그렇게 거대한 산 같았던 스승의 수련장에서 드디어 하산했다. 세상을 향한 첫 걸음이었다. 스승의 난실을 나오면서 다시 한번 허리를 꾸벅 숙였다. 온 세상이 다 덤벼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넘쳤다.

 

 

<이대건 농업명장의 구술을 1인칭 시점으로 가공해 작성한 기사입니다>

저작권자 © 대구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