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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고대 한반도 남부는 일본의 식민지였다”

독도 바르게 알기

  • 입력 2015.04.02 00:00
  • 수정 2015.04.03 11:00
  • 기자명 대구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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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을 폐지하고 천사(天使)를 받아들이지 않는 조선은 배은망덕하니, 장차 화륜선을 이끌고 토벌하리라!”
1867년 하치노부 준슈쿠(八戶順叔)라는 일본인이 중국 <북경신문>에 기고한 내용이었다. 청나라와 조선이 발칵 뒤집어졌다. 요즘 말로 하면 “이놈의 히키코모리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쯤의 반응이었다.
 
당시 메이지정부 일부 고위층들의 머릿속에는 ‘조선속국론’이 가득 차 있었다. 허무맹랑한 이야기였지만 이를 굳게 믿는 일본인이 많았던 듯하다. 속국론을 요약하면 이렇다.
 
‘고대 한반도는 ‘진구황후의 정벌’로 일본의 속국이 된 후 신라에 이어 고려까지 조공을 바치면서 일본을 섬겨왔다. 조선시대 들어 조공이 뜸해지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무례한 ‘조선’을 성토하려고 군사를 일으켰으며 혼이 난 조선은 이후 때마다 사절(통신사)를 파견해 속국의 예를 다했다.’
 
위의 일본인은 일본과의 교역을 거부하고 오만하게 군다면 다시 한번 ‘속국의 위치’를 확인시켜주겠다고 협박한 것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신공황우 정벌, 혹은 임나일본부설이다. 일본의 ‘한반도 속국론’의 시발점이다. 그런 만큼 임나일본부의 뿌리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통설 : 야마토(大和)정권이 4세기 중반에서 6세기 중반까지 약 200여 년간 한반도 남부의 임나를 직접 지배했고, 백제와 신라를 간접 지배했으며 그 지배기구로 설치한 것이 임나일본부였다.
 
반박 :그들이 ‘임나일본부’를 세웠다고 하지만 일본(日本)이라는 표현은 당시(4~6세기)에는 생겨나지도 않은 말이다. ‘일본’이라는 표현은 7세기 후반에 생겨났다. 첫 단추부터 억지스럽다.
 
일본의 통설 : 한반도 남부경영의 근거는 369년 신라를 격파하고 가야7국을 평정한 다음 백제를 서번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진구황후 49년(369) 기록에 의하면 작전은 두 갈래로 이루어졌다. 백제 근초고왕과 왕자 근구수가 이끌고 백제 수도 한성에서 고해진으로 직행했다. 한 부대는 일본 아라타와케ㆍ카가와케가 이끄는 야마토정권의 부대가 백제 장군 ‘목라근
자’의 지원을 받아 탁순(卓淳/대구)에 집결, 신라를 격파하고 가야7국을 평정한 다음 한반도 남해안의 서쪽으로 진격하여 고해진(강진)에 이르러 남만 침미다례(강진)을 취해서 백제에 주었다.
 
반박 : 1) ‘남만 침미다례를 취해서 백제에 주었다’는 내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구절에서 가야7국의 평정한 주도세력이 백제군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침미다례는 오늘날의 ‘강진’이다.
 
백제에서 볼 때에는 남쪽에 있으므로 ‘남만(南蠻)’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 볼 때는 서쪽에 있으므로 ‘서융(西戎)’이나 서만(西蠻)이 되어야 한다. ‘남만’ 침미다례를 취한 것은 야마토 정권이 아니라 백제일 수밖에 없다. 탁순에서 출발하여 치미다례를 취한 군대의 책임자는 백제장군이고, 그 책임자는 백제장군 목라근자였다. - 이후 목라근자는 아들 목만치와 함께 2대에 걸쳐 임나를 경영했다. 결론적으로 <일본서기>에 야마토정권이 임나를 경영한 것처럼 되어 있는 내용의 원형은 백제의 이야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우리는 일본과 백제의 관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두 나라는 문화와 군사적인 측면에서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 백제는 문화를 수출하고, 일본은 백제에 군사 원조를 했다. 두 국가의 밀착 관계를 드러내는 인물이 있다. 바로 목라근자의 아들 목만치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는데, 그가 도일한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소가(蘇我ㆍ우리 음으로는 소아)씨의 조상으로 소가만지(蘇我滿智 -소가노마치)가 등장했다. 목만치와 이름이 같다. 일본 학계는 소가만지가 목만치일 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제기했다.

소가씨는 5세기 후반 ~ 6세기 말에 걸쳐 백제에서 건너온 기술자들을 장악하고 이들을 바탕으로 야마토정권의 실권을 장악했다. 백제 기술자들은 일본 관료제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는데, 이들을 거느린 소가씨는 자연스럽게 야마토정권을 주도했다. 특히, 587년 소가노 우마코 때 대립관계에 있던 모노노베씨를 타도하고 이후 7세기 후반까지 야마토정권을 장악했다. 열도는 친백제정권이 들어섰다. 일본과 백제는 그만큼 밀접한 관계였던 것이다.
 
일본의 통설 : <광개토대왕비문>에 의하면 404년 고구려와 싸운 3국 연합의 주체는 왜다.
 
반박 : 어느 기록에도 백제가 왜의 영향 하에 들어갔다는 근거가 없다. 또한 전쟁의 주체가 왜가 되어야 할 이유도 없다. 비문을 살펴보면 백제가 주력군이나 왜와 가야군은 증원군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비문에는 이 군대가 결성된 이유를 설명하는 구절이 담겨 있다. <광개토대왕비문> 369년 기록 중 “대왕은 친히 군을 인솔하여 백제를 토벌하였다. … 아리수(한강)을 건너서 그 국성을 포위하자 백제왕은 곤핍하여 남녀 노예 1000명과 세포 1000필을 바치고 대왕 앞에 절하고 이후 영원히 노객(奴客-복종하고 신속한다는 뜻)이 될 것을 맹세하였다.”(영락 6년조)는 것이 있다. 백제왕으로서는 치욕적인 패배였을 것이다. 설욕이 필요했다. 이에 왜와 가야를 증원군으로 끌어들여 자존심 회복에 나선 것이었다. 일본의 통설 : 438년 송에 사신을 파견하면서 “사지절도독 왜ㆍ백제ㆍ신라ㆍ임나ㆍ진한ㆍ모한 6국 제군사안동대장군 왜국왕”(황제의 명을 받아서 왜ㆍ백제ㆍ신라ㆍ임나ㆍ진한ㆍ모한 6국의 군사를 관장하는 안동대장군 겸 왜국왕)을 자칭한다.
 
478년에는 “사지절도독 왜ㆍ백제ㆍ신라ㆍ임나ㆍ가라ㆍ진한ㆍ모한 7국 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을 자칭한다. 왜 5왕이 자칭한 한반도 남부에 대한 제(諸)군사권은 <일본서기>의 ‘명기’된 야마토정권의 한반도 남부경영을 뒷받침한다. 게다가 기록이 담긴 <송서>는 제3국의 자료로서 객관성이 높다.
 
반박 : 저런 기록이 나온 배경과 실체를 이해해야 한다. 먼저 왜왕은 백제ㆍ신라ㆍ임나ㆍ가야ㆍ진한ㆍ모한(마한)을 언급했는데, 서로 중복된다. 5세기 당시 마한은 백제에, 진한은 신라에 통합되었다. 또한 임나는 여러 가야 중 하나로 모든 가야를 포괄하는 광의의 가야에 포함되어야 한다. 요컨대, 마한과 백제, 진한과 신라, 임나와 가야는 중복된다. 왜 5왕의 주장은 당시 한반도의 상황을 정확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백제와의 관계도 주목해야 한다. 백제가 397년 왕자 전지를 왜에 파견하여 399년 대고구려전에 왜를 끌어들인 뒤부터 야마토정권은 백제를 지원하는 입장에 있었다. 6세기에 들어서 야마토정권은 백제로부터 선진문물을 얻고, 백제에 군사를 제공하는 특수한 관계로 발전했다. 야마토정권이 5세기에 백제에 군사권을 주장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또한 임나(고령가야)나 가야(모든 가야를 포함하는 광의의 의미)는 369년 가야7국 평정 이래 백제의 영향 아래에 들어갔다. 진한과 마한 중 진한은 4세기 후반 신라에, 마한은 4세기 중반 이미 백제에 통합되었다. 왜 5왕의 시대인 5세기에는 진한과 마한 모두 이미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았다. 왜 5왕 시대에 임나, 가야, 진한, 마한 중에서 왜가 군사권을 주장할 수 있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결론 : 야마토정권은 임나를 경영한 주체가 아니라 백제를 지원하는 입장에 지나지 않았다.
 
최근 일본은 다시 우경화했다. 과거사, 독도문제 등 마치 모든 문제의 시발점이 주변국에 있는 것처럼 여론몰이를 하고 있다. 이러한 패턴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정한론’이 고개를 들었던 메이지유신 시기에도 그들은 밖으로 돌려야 할 내부의 불만이 있었다. 일본은 수백 년 지속된 막부 체제를 끝내고 근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소요와 불만이 일어났다. 또한 특권을 잃어버린 사무라이들의 울분을 해소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이에 유신 삼걸 중이 한 명으로 불리던 사이고 다카모(西鄕隆盛, 1828~1877)를 중심으로 정한론이 확대됐다.
 
이런 역사는 이미 수백 년 전에도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상인들을 위해 명과 조선의 쇄국을 풀겠다는 실리적인 목적 외에 옛 전국시대에 미련을 가진 세력들을 잠 재울 필요도 있었다. 내부의 불안과 불만을 외부로 표출한 것이었다. 
 
일본은 경제적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하다. 이런 시기 이 모든 문제의 원흉이 외부에 있는 ‘적들’인 것처럼 분위기를 조정해나가는 것은 과거의 패턴으로 볼 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일본 내부가 힘들어질수록 ‘독도’를 비롯한 한일 갈등은 더더욱 첨예한 대립각을 세울 것이다. 우리는 이에 적절하게 대응해야 한다.
 
여기서 꼭 짚어야 할 것이 있다. 일본 내에는 정한론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을 적대시하지 말고 잘 협력해서 ‘청-조선-일본’이 공동 라인을 형성해 러시아등에 대처하자는 의견이었다. 우리(조선)이 일본의 내부를 잘 알았더라면 이들과 손잡고 역사적 파국을 피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지금도 일본에는 소위 ‘한국파’들이 존재한다. 독도 문제에 대해서도 편향된 입장을 벗어나 소신껏 의견을 개진하는 이들이다. 한류 열풍도 일본이 가장 거셌다. 마치 여론을 주도하는 듯한 ‘우익’이 일본의 전부라고 보면 안 된다. 수면 아래에서 아시아의공영을 갈망하는 이들과 ‘세계 시민’으로서의 연대를 강화한다면 한일 사이의 꼬인 실타래를 풀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가정이 없지만, 이래는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달라진다.
 
*참고
함규진, <조약의 세계사>, 미래의창, 2014
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창비,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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