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무대체질, 만능 방송인 되고 싶어요!”“방송인이 장래 희망입니다. 리포터나 기상캐스터, 쇼호스트 등 어떤 방송이든 주어진다면 최선을 다 해 임하고 싶습니다. 작은 것부터 차근차근 밟아서 성장한 다음 어떤 역이든 다 잘할 수 있는 방송인으로 우뚝 서고 싶습니다.” 2023 미스대구쉬메릭진을 차지한 장다연(21ㆍ영남대 영문학과)씨는 소위 ‘무대 체질’이다. 어릴 때부터 무대에 올라가는 걸 즐겼다. 이번 미스 대구 대회에서도 떨리기보다는 즐기면서 임했다. 학창 시절 댄스팀으로 무대에 몇 번 올랐던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공자는 60세를 이순(耳順)이라고 하며 세상 이야기를 들으면 그 뜻을 알게 된다고 하였다. 그것은 세상이 지니는 가치의 존귀함을 알고, 지향할 바를 바르게 판단하고, 행할 나이에 이르렀다는 것과 같다.안동시는 1963년 1월 1일 안동읍에서 안동시로 승격하여 올해로 60주년을 맞았다. 세상 이치를 알고 한 갑자 돌아 토끼해를 맞으며 새로운 출발선에 섰다. 이즈음 지나온 시간에 대한 반성과 현재에 대한 냉철한 판단과 결단이 필요하다.안동시는 60년의 시간이 지나며 많은 변화가 있었다. 예산을 살펴보면 1962년 4,672만 원 남짓이
김해일 의류관사업협동조합 이사장은 조합원들 사이에서 ‘실타래 이사장’으로 불 린다. 임기 초, 빈번하게 일어났던 조합원 간의 갈등을 원활하게 풀어나간 덕분이다. 하지만 김 이사장에겐 남모를 고민이 있다. 그를 이어 의류관을 이끌어 갈 마땅한 후임자가 나타나지 않는 까닭이다. 4년의 임기가 끝난 지 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 사장직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조만간 더 훌륭한 사람이 나타나 조합을 이끌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그때까 지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말했다. 김 이사장을 만나 2022년 의류관에 산적해있는 현안들과
나는 1학기 수시로 대학에 진학했다. 나는 2000년대 초반이라 지역 고교에서는 아직 정시에 매달릴 때였고 수시는 대부분 관심 밖이었다.나는 담임선생님에게 수시에 올인하겠다고 선언했고 선생님도 내 뜻을 흔쾌히 받아주셨다. 낯선 길에 과감히 뛰어들었고, 나는 보기 좋게 성공했다.내가 수시에 그토록 매달렸던 것은 정시까지 기다릴 수 없어서였다. 하루라도 빨리
“두 달을 넘기기 힘들 듯합니다…….”나는 26살이었다. 폐결핵에 걸렸고, 의사가 내게 가차없는 시한부 선고를 했다. 대단한 확신을 가지고 2년도 아니고 2달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병은 강도처럼 찾아왔다. 밤길을 걷다가 괴한에게 몽둥이로 맞은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몸이 나빠졌다. 책장에 이는 바람에도 기침이 났고, 기침을
“이 모든 게 어머니 덕분이에요!”나를 소리의 세계로 이끈 건 어머니였다. 고3 때 전주대사습에서 장원을 타고 인터뷰를 할 때도 어머니 이야기만 했었다. 나는 지금도 내가 소리꾼이 되는 가장 큰 역할을 하신 분이 내 어머니라고 생각한다.그런데, 생각할수록 궁금한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어머니가 내게 국악적 재능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셨을까 하는 것이다.
“원표야, 막걸리 받아오너라!”아버지는 자개 공장을 운영하셨다. 공장에서 일하는 분이 10명쯤 됐는데, 직원들이 모두 우리 집을 기숙사 삼아 먹고 잤다.직원들은 일을 마치고 나면 어머니와 밥하는 아주머니가 차려주는 저녁을 먹고 내가 받아온 막걸리로 입가심을 했다. 반주에 은근히 취기가 오르면 으레 노래판이 벌어졌다. 밥상에 둘러앉은 사람 중의 한분이 젓가락
산처럼 높은 사랑, 강처럼 깊은 인내! 어느 날, 한 남자가 우리 집에 쌀포대를 들고 왔다. 내가 물었다. “이게 뭡니까?” 그는 내가 쌀과 보리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지 이렇게 대답했다. “쌀입니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낯선 사람이 왜 내게 쌀을 주는 걸까. 그는 내 표정을 이해했는지 명랑한 목소리로
“너 한국에서도 이렇게 먹어?”극단 사계(四季)에 입단한 지 일 년쯤 지났을 때였다. 나는 극단의 선배 몇 명을 자취방으로 초대해 김치찌개와 떡볶이를 대접했다.내가 차린 음식을 보고 선배가 저렇게 물었다. 너무 매운 음식을 먹는다는 뜻인가? 질문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상냥하게 대답했다.“그럼요. 한국에 있을 때부터 제일 좋아한 음식들이에요.”선배들의
이민주 민뷰티샵 대표 원장‘엄마와 함께 그려가는 내 인생’‘나는 공부 열심히 해서 망한 케이스였다’고2 올라올 때만 하더라도 중하위권 성적이었다. 미대를 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공부는 뒷전이었다.고2 1학기가 다 끝날 무렵 미술 학원에서 만난 친구가 이렇게 조언했다.“미대도 좋은 델 가려면 성적도 중요해. 그림만 잘 그린다고 되는 게 아니래.”미대를 가려고
콩 심은 데 콩 난다 말, '아버지를 닮아버린 나'“승렬아 퍼뜩 내려온나! 너그 아부지 쓰러지셨다.” 1989년 가을이었다. 나는 서울에서 한의원 개원을 준비하고 있었다. 왕십리 하숙집 주인아주머니가 건네준 전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어머니의 다급한 목소리. 전화를 끊은 후 곧장 밤차를 타고 황급히 대구로 내려갔다. “아버지 괜찮아예?” 집
나의 아버지 - 은동엽 따뜻한속내과 원장누나만 일곱인 막내아들을 ‘진짜 남자’로 만든 아버지의 삶 고등학교 때 나의 별명은 ‘아부지’였다. 삼년 내내 어른들이 입는 바지를 입고 다닌 때문이었다. 바지의 출처는 자형들이었다. 어머니가 자형들이 입던 옷을 내 체형에 맞춰 수선해서 나에게 입혔다. 바지는 차고 넘쳤다. 누나가
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태풍과 봄바람이 공존했다. 태풍이 밀어닥치다가도 몇 분 만에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한 언니, 이유가...봄바람을 부른 건 나였고, 광풍을 일으킨 장본인은 언니였다. 언니와 아버지가 마주치면 천둥이 치고 폭풍이 몰아쳤다. 심할 땐 하루에도 몇 번씩.고등학교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대학에 입학한 뒤부터 언니
나는 겁도 없이 칼날 위에 올라섰다. 1981년 봄, 내 나이 삼십 대 초반에 고향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선전은 했다. 후보 7명 중 2명을 뽑는데 3등을 했다. 내 고향인 청송에서는 표를 50% 가까운 득표를 해서 여당 후보를 깜짝 놀라게 했다. 청송과 비교할 때 영덕은 인구수가 2배, 울진은 3배였다. 고향사람들의 지지를 이끌어냈지만 결국 이웃
두 번의 이별과 파산에도 한결같이 꿋꿋했던 어머니불행은 한꺼번에 몰려온다. 아니, 한꺼번에 몰려오기 때문에 불행이다.1996년 1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뜩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갑작스러운 건 아니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1년 전부터 요양사를 따로 둬야 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건강관리 좀 하시지. 젊을 대부터 간이 안 좋았는데…&h
인턴 시절, 나는 소아과 병동이 좋았다. 환자가 모두 어린 아이들이어서 의사와 간호사들이 아빠처럼, 누나처럼 친절했다. 늘 웃는 얼굴로 아이들을 대했고, 의사들은 재미난 표정을 지으면서 아이들을 웃기려고 애쓰기도 했다. 환자 생일에는 고깔모자에케이크를 들고 축하파티를 했다. 그런 날이면 내가 괜히 어린아이처럼 들떴다. 내 어린 시절 그런 기억이 많지 않았기
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태풍과 봄바람이 공존했다. 태풍이 밀어닥치다가도 몇 분 만에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봄바람을 부른 건 나였고, 광풍을 일으킨 장본인은 언니였다. 언니와 아버지가 마주치면 천둥이 치고 폭풍이 몰아쳤다. 심할 땐 하루에도 몇 번씩.대학 졸업하자마자 결혼한 언니고등학교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대학에 입학한 뒤부터 언니와 아버지의 갈
지난 5월 9일 오후 3ㆍ7시 두 차례에 걸쳐 펼쳐진 ‘2015 현철&김용임 효 콘서트’에 5,000여 관객이 객석을 가득 메웠다. 관객들은 현철 김용임의 히트곡을 따라 부르며 박수갈채로 호응했다. 특히 이날 공연은 단순한 콘서트를 넘어 어린이합창단과 지역 가수, 사회자 등이 함께 멋진 상황극을 연출하는 등 풍성한 무대로 눈길을 끌었다. 공연은 30여 명의
1994년, 아버지가 실직을 했다. 실직 후 얼마쯤 막노동을 했다. 갑작스런 육체노동에 근육들이 놀랐는지 아버지는 밤마다 끙끙, 신음을 흘렸다.“통닭집 합시다. 내 다 알아 봤습니다. 개안타 카대예.”보다 못한 어머니가 통닭집을 하자고 했고, 아버지는 못 이기는 척 받아들였다. 그렇게 우리 집은 통닭집이 되었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통닭집 아들로 불리기 시
1994년, 아버지가 실직을 했다. 실직 후 얼마쯤 막노동을 했다. 갑작스런 육체노동에 근육들이 놀랐는지 아버지는 밤마다 끙끙, 신음을 흘렸다.“통닭집 합시다. 내 다 알아 봤습니다. 개안타 카대예.” 보다 못한 어머니가 통닭집을 하자고 했고, 아버지는 못 이기는 척 받아들였다. 그렇게 우리 집은 통닭집이 되었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통닭집 아들로 불리기